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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r 21. 2024

잉카제국과 정복자 삐사로



"오늘 출항한다며 뭐 그리 빨리 간대?"

"아녜요, 일요일이 껴서 그나마 오래 있는 거예요. 굴러다니는 차 하역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요. 곡물이나 잡화 싣고 오면 좀 오래 있긴 해요."

유빈 누나가 못내 아쉬운 듯 눈가가 젖으며 잠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럼 이 근처에 잉카제국의 마지막 역사인 까하마르까라는 곳이 있는데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봐."

누나 말에 반색하고 대답했다.

"아이고, 노란 잉카 콜라나 한잔 마시고 가죠."


삐우라에는 한국 부식 파는 데가 없어 마이애미에서 일 년에 몇 번 컨테이너로 부속이나 더블 픽업 사고 차를 잘라서 보낼 때 고추장, 된장, 라면 같은 한국 부식을 사서 보낸단다.

그러니 여기선 한국 음식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누나, 마이애미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지명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아요?"

내가 묻자, 잠시 생각하다가 누나가 대답했다.

"이름이 예쁘긴 한데 내가 어떻게 아니?"

"그게 아메리칸 인디언 마이애미족이 거기 살았는데 인디언 말로 마이애미아가 '하류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래요. 16세기에 스페인 애들이 점령했다가 19세기 들어 미국 들이 빼앗았대요. 우리 조상들은 그때 뭐 했나 모르겠어. 애먼 사람들 삼수갑산으로 유배 보낼 게 아니라 사람 거의 안 살던 호주, 보르네오 같은 데로 귀양 보냈으면 '이 땅은 나의 땅!' 하고 깃발 꽂고 만세 불렀을 건데."


잉카제국의 고도였던 까하마르까, 잉카 몰락이 시작된 도시이다.

해발 2,750m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가 이복동생과의 왕권 전쟁에서 이긴 후 까하마르까 온천에서 쉬다가 에스빠냐의 삐사로 군대에게 잡혀 결국 잉카가 망하게 되었다.

그런 서글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섭씨 80도의 유황 온천수는 솟고 있고 그 옆에는 예쁜 꽃이 피어 있다.

삐사로는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뻬루의 수도가 된 리마를 건설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까막눈이었기에 직접 남긴 잉카 원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삐사로는 예나 지금이나 스페인에서 가장 못 사는 루히요라는 깡촌에서 늘 푼수 없는 농사일하싫어 스무 살이 되자 군인이 되려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던 중 한몫 잡을 생각에 신대륙 개척에 따라갔다.   

그 후 발보아 원정대에 끼어 처음으로 태평양을 본 유럽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파나마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총독의 지시로 직접 발보아를 체포하였고 그 공으로 파나마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그런데 파나마는 아직 도시 건설 전이라 밀림뿐이었다.

감투만 그럴듯했지 실속은 없었다는 이야기지.

장관자리가 괜찮았으면 삐사로가 굳이 머나먼 잉카까지 목숨 걸고 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육촌 동생인 에르난 꼬르떼스가 겨우 천여 명의 군사로 아즈텍제국을 정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여기에 더하여 남쪽 어딘가에 황금 제국 엘도라도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남아메리카 원정을 결심한다.

당시 남미는 그야말로 미지의 땅으로 에스빠냐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멕시코 일부와 파나마 정도였다.


처음 남미 원정은 정보 부족, 물자 부족으로 거지가 되었다.

그래서 파나마 총독은 삐사로의 남미 원정을 반대하게 된다.

때는 파나마 도시 건설을 시작하던 때라 일손이 턱없이 모자라는 판에 허황된 엘도라도 보물 얘기로 젊은이들을 꼬드겨 데려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총독은 삐사로에게 귀환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땅바닥에 금을 긋고 '나와 함께 인생을 바꾸고 싶은 사람은 이 선 안에 남아라!' 해서 열세 명이 남는다.

후에 이들은 '명예로운 13인'이라고 역사에 남는다.

열세 명 상거지로 몇 달을 더 버틴다.

결국 삐사로는 파나마 총독보다 끗발 좋은 사람을 찾아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삐사로는 카를로스 국왕에게 남쪽에 아즈텍만큼이나 잘 사는 나라가 있다고 보고하고, 그 증거로 각종 금은보화와 원주민 통역사까지 보여주니 국왕은 입이 절로 찢어졌다.

국왕은 삐사로에게 바로 원정군의 총사령관, 미래의 총독 지위를 약속한다.

실제 삐사로의 남미 원정은 제대로 지원받지도 못했을뿐더러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이는 멕시코와 파나마 건설이 막 시작해서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약속은 말로만 한 것이고 실질적인 지원은 없었다. 달랑 국왕이 서명한 종이 한 장뿐이었다.


어쨌든 국왕의 허가를 받은 삐사로는 의기양양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어차피 땅이나 파먹고 술에 절어 살 인생인 동생들을 데리고 함께 신대륙으로 떠난다.

그렇게 삐사로의 선발대가 안데스 산맥을 넘어 까하마르까 부근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로 근처에 잉카 황제가 수만 대군과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삐사로의 원래 계획은 잉카 황제를 만나 충돌 없이 순조롭게 제국을 접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꼬르떼스가 아즈텍을 정복한 방법에서 교훈을 얻어, 황제 신병 인수 후 이용만 하고 버릴 생각이었는데 뜬금없이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부근에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잉카 군사는 잘 정비된 고산 도로망과 봉화로 낯선 자들이 까하마르까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담으로 잉카인들은 고산 도로에서 이동할 때 발자국이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부족에게 노출되지 않게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걷기 때문에 몇 명이 이동했는지 알 수가 없단다.

험준한 안데스 고산을 오르느라 기진맥진한 스페인 군사들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부처님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는 고산지대의 잉카 용사들.

셀 수도 없이 많은 군막과 잘 정돈된 주둔지는 삐사로의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어쨌든 삐사로의 부하 소또가 처음으로 잉카 황제를 접견한다.  

이때 황제는 난생처음 말을 보았는데 특히 소또가 황제 바로 앞에서 말을 급정지하는 기마술을 보이자,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경호대원들이 순간적으로 겁을 먹고 뒷걸음질치기도 했단다.

나중에 그 경호원들 다 목을 벴다나...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판단을 잘못했다.

자신의 병력에 비해 스페인 군인이 얼마 안 된다고 깔보고 호위 병력도 없이 직접 찾아간 것이다.

예상치도 못하게 황제의 대군과 마주친 데다가 그가 직접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로 원정대는 바짝 졸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잉카 군대는 수만 명인데 자기들은 겨우 보병과 기마병 모두 이백 명이 안 되고 대포가 10문뿐이었기 때문이다.


잉카 황제가 가마를 타고 나타나자 제일 먼저 나선 이는 도미니코회의 수사였다.

그는 스페인 국왕의 조서를 읽어주었다.

그러나 통역을 해줘도 잘 알아듣지 못한 황제는 이나 문자를 그때 처음 보았고 얇은 하얀 종이를 보고 소리 내 읽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잉카 황제가 낯선 이방인이 마음에 들지 않수사의 팔을 고 종이를 집어던졌다.

극도의 공포감에 수사가 자국 진영으로 도망치며 '저놈들을 공격해라. 하느님을 거부했다!'며 소리를 질렀다.

이에 어쩔 줄 모르던 삐사로가 반대편에 숨어있던 포병에게 공격신호를 보냈고 곧바로 몰려나와 몸싸움을 벌이며 황제를 생포하고, 잉카 병사들을 향해 냅다 대포를 쏘고, 기병이 돌진하여 마구 죽였다.

이때 수많은 잉카 귀족들이 한순간에 죽었다고 한다.

황제의 가마를 메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기에, 고위 귀족인 가마꾼들은 팔이 잘려 나가도 가마를 붙잡고 있었고, 가마꾼이 죽어 쓰러지면 다른 귀족이 달려와 가마를 멨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도 황제가 용변 보면 뒤처리는 시종이 하는 게 아니라 귀족들이 했다고 한다.

이때 고위 귀족들이 많이 죽고 또 많은 병력이 도망치다가 넘어져 깔려 죽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당시로서는 최신식 병기라고 할 수 있는 철제 무기와 투구, 갑옷으로 무장했고 말과 총, 대포까지 갖춘 군사였고, 잉카 용사는 수만 많았지 갑옷이라 하기에는 엉성한 직물 소재에 청동과 나무 곤봉으로 무장한 방범대 수준이었다.

잉카 병사의 주력 무기인 나무 곤봉으로는 스페인 군사의 튼튼한 철제 갑옷과 투구를 제압할 수 없었다.

결국 황제는 어처구니없이 삐사로 원정대에게 생포되었으며 수만 명에 달하는 잉카 대군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이로서 삐사로는 한숨 돌리게 되었다.

그의 목적은 식민지를 만들어 총독이 되는 것이기에 잉카의 황제를 최대한 옆에 끼고 있어야 안정적인 식민지 건설이 가능하고 황제를 죽이거나 잉카와 전쟁을 벌일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황제는 이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이방인들의 속셈이 금과 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이 탐욕스러운 침략자들에게 제안한다.

자기가 잡혀있던 방에 금은을 채워줄 테니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보존된 꽈르또 델 에스까떼, '진실의 방' 아니 '몸값의 방'이 여기서 나왔고, 까하마르까는 금과 은표시된 선까지 채워주겠다 상자, 방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이러는 사이 잉카의 금과 은이 차곡차곡 모였다.

그런데 삐사로의 원정대가 이것들을 전부 녹여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정복군에게 노획물을 정확하게 분배하기 위해서였다.

기록에는 기병 1인당 금 40kg, 은 80kg 그리고 보병에겐 그 반이 분배되었다고 한다.

요즘 시세로 따지면 기병 1인당 20억 원 정도 될까.

삐사로의 경우 기병의 일곱 배를 받았으며, 황제가 보너스로 황금 가마까지 선물했다고 한다.

스페인 국왕은 가라 서류 한 장 잘 내준 덕에 손 안 대고 금 1톤과 은 2톤이 생겼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정복자 전원이 이처럼 많은 재물을 포상받 경우는 세계 역사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삐사로의 동업자인 알마그로가 분배 불만이 있어  애먼 잉카 황제가 처형된다.

그 후 알마그로는 원정대를 이끌고 미지의 남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소또는 잉카에서 얻은 재물로 새로운 원정대를 만들어 북아메리카로 올라갔다.


원정 초기에 삐사로가 명예로운 13인과 원정을 계속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이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단 몇 달이라도 원정이 늦어졌어도 잉카 황제는 이미 수도인 꾸스꼬에 들어가 체제를 정비하여 날로 먹은 잉카 황제 체포 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잉카제국은 차근차근 정복자들에게 넘어갔으며, 더욱더 깊고 으슥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 저항했으나 마지막 황제가 체포, 처형되고 잉카제국은 겨우 한 세기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잊혀진 도시라는 마추픽추도 잉카 문명의 일부이다.

잉카 제국의 멸망에는 에스빠냐 사람들이 퍼트린 천연두에 인디오가 반 가까이 죽었고, 남은 많은 인디오 부족이 독립하려고 잉카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한다.

삐사로와 꼬르떼스 두 육촌 형제가 지휘했던 스페인 정복자들은 적은 인원으로 너무나 쉽게 잉카와 아즈텍제국정복하였다.

꼬르떼스의 기사들은 삐사로의 기사와 달리 아주 적은 배당금을 받아 열받아 멕시코 주변을 약탈하다가 마야 문명이 사라지는데 일조를 했다고 한다.

이후 브라질을 제외한 전 중남미를 스페인이 식민 통치하게 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겪은 잉카 후손들은 삐사로를 역사상 최악의 제국주의 악마로 평가한다.

심지어 조국인 스페인에서도 남미에서 그가 한 짓은 피의 악마라고 말한다.  

나라 황제가 천주교 좀 안 믿는다고 잡아다 죽이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삥 뜯기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거대 문명이 멸망했다.


한편 삐사로 덕분에 훗날 세계사에서 근대와 현대로 나뉠 유럽의 급성장 원동력이 되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삐사로의 남미 원정 이전까지는 유럽에 금과 은화가 많이 부족했는데 잉카와 명나라에서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이 들어와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것이 유럽의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치게 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스페인 깡촌 뜨루히요에서 돼지 키우던 농부 삐사로는 자기 인생을 바꾸려고 둥지를 벗어나 자기 꿈을 이루고 결국 세계 역사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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