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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r 20. 2024

뻬루 삐우라에서 유빈 누나와의 만남



 년 전 배를 처음 탈 때 요코하마에서 승선하기에 비행기 타러 김포공항으로 갔다.

김포에서 교직에 있는 국민학교 동창 준우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공항버스 타기 전에 배 타러 출국한다고 전화하고,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달려왔다.

내 손에 달러 한 뭉치 쥐여주면서 ‘잔돈으로 바꿨다. 가서 힘들면 전화해라.’라고 말하며 수업이 있다고 조용히 사라졌다.

남희는 옆에서 자길 잊지 말라며 무슨 신파극인지 먼 산 보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찔끔 짜고...

그때 내 안 돌아가는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그동안 그녀가 내게 해 왔던 것이 여기 와서 갑자기 눈물 짜는 것과 매치가 되지 않았었다.

유빈 누나는 옆에서 실실 웃기만 하고...


준우와 나는 연락하면 서로 두말없이 만나 쓴 소주라도 한잔 나누었다.,

중학교 3학년 땐가 동대문교회 옆에 새로 생긴 이대부속병원 벤치에 앉아서 내게 묻던 말이 기억난다.  

“너는 어떤 게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니?”

어려서부터 조숙하고 생각이 많았던 준우가 묻는 말에 맹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땅히 할 말을 못 찾고 그를 쳐다보니 먼 하늘을 응시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몇십 년을 소식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도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해.”

아직 우리는 오랫동안 못  만나 본 적은 없었다.

군대에 있을 때도 휴가 때 가깝지 않은 서로의 부대를 찾아 가 술 한잔할 정도였다.

그런데 노잣돈을 다 챙겨주다니...


이탈리아 사보나 항에서 삐우라로 갈 차와 중장비를 실을 때 유빈 누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부두 구석에 핀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보면서 누나와의 어린 시절 옛 생각에 목이 메어 뜨거운 것이 눈앞을 가렸다.

누나, 조금 있으면 우리 배가 이탈리아에서 차와 중장비를 싣고 삐우라에 갑니다.

이제 제가 돈을 버니 만나면 정말 맛있는 걸 대접해드려야 할 텐데...


'HAPPY LATIN' 호는 긴 항해의 여운을 스크루의 물거품으로 남기고 삐우라의 빠이따 항을 향해 선수를 140도로 돌렸다.

삐우라가 가까워지니 유빈 누나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목소리도 차분한 데다가 아담하고 귀여운 여인 유빈 누나.

정이 많은 누나와 여린 나는 오랜만의 만남에 울면 어떻해,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됐다.


뻬루와 칠레 중부까지 그 긴 해안지역이 다 사막이다.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회색빛 물이 흐르는 강변으로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농사짓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삐우라는 에콰도르 국경에서 300여 km가 채 떨어지지 않았는데 바다가 깨끗하고 공기도 좋고 하늘이 다.

누나가 이곳에 정 붙이고 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유빈 누나와 매형이 부두 게이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이역만리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렇게 큰 배를 타고 턱 하니 나타나는 동생을 보고 누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남이 보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다 큰 동생을 얼싸안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말을 못 하고 흐느끼기만 한다.

이산가족 상봉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 교민이 거의 살지 않는 뻬루 변방에서 대한국인 동생을 만나니 얼마나 반가울까.


누나 집에 가서 맛있는 찬초 숯불구이에 저녁을 먹으면서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 날 가까운 바닷가인 꼴란에 갔다.

유명한 뻬루 막회인 세비체에 꾸스께냐 맥주를 마시며 또 지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바닷가에 발을 담가봤다.

이곳은 인구가 많지 않아 공해가 별로 없지만 날씨가 더워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일요일에 해수욕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발바닥에 뭔가 딱딱한 게 느껴져 주워보니 조개였다.

수영하던 아이들과 누나도 신이 나서 조개를 건졌다.

잠깐만에 온 식구가 한 끼는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조개를 주웠다.

남미 사는 영감님 누군가가 말했다지, 고기를 식구들 먹을 만큼만 잡으면 그만 잡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고...  


할 말이 아직도 남았는지 바닷가를 누나와 같이 팔짱 끼고 걷다가 인적 없는 모래사장에 물개 몇 마리가 일광욕하는 게 보였다.

사람이 가까이 가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너무 가까이 갔다가 서로 불편한 일을 겪을지 몰라 사진을 찍으며 한참 구경만 하고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 누나의 현지인 친구 농장을 방문했다.

약 1ha 정도 크기의 작은 농장이라는데 망고, 바나나, 빠빠야, 아보카도 등 오만 과일과 고구마보다 맛있다는 유까 등 먹을거리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누나도 빈 땅 곳곳에 배추, 열무, 상추, 파 등을 심어 일용할 양식으로 충당한단다.

인심이 넉넉한 친구라서 잘 익은 제철 과일을 얼마든지 따가라 하고 더 못 줘서 안달이란다.

이민 가서 현지인과 이렇게 잘 지내는 걸 보니 누나는 성공한 이민자 중 한 사람인가 보다.

농장에 와보니 문득 누나가 편지에 쓴 것이 생각났다.


사랑하는 동생.

이곳 삐우라는 무더운 긴 여름이 가고 있어.

시장에 주황색 감이 얼굴을 내밀었더라고.

이곳에선 생각하지도 않았던 과일이라 미친 듯이 볼사(비닐봉지)에 주워 담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다 나왔지.

한국에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머나먼 뻬루에선 감동해서 목이 메고 눈물을 찔끔 짜고...


날씨가 갑자기 서늘해지니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아지네.

가깝게는 엄마, 아빠부터 네 형 그리고 늘 생각나는 허물없이 친한 사람들이 전부 보고 싶어진다.

이런 게 향수병인가?

한국에서도 유난히 가을을 타서 가을에는 노래 한 곡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때가 생각난다.

스산한 가을밤,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

세상의 번민과 고독을 나 혼자만 다 안고 가듯이 그렇게 심한 가을앓이를 했었지.

그래서 나는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좋아하면서도 그 느낌이 싫어 한편으로는  계절이 빨리 지나가길 바랬어.

떨어지는 낙엽이며 보이는 것마다 다 마음이 너무 쓸쓸하고 심란해서...

그나마 삐우라의 가을은 한국처럼 그렇게 쓸쓸하지 않아서 견딜 만 해.


문득 전에 해발 4,000m가 넘는 와라스에 여행 갔다 한국에서 가져왔던 코스모스 씨앗이 생각나서 집에 돌아와 정신없이 찾아보니 어디 처박혀 있는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어.

유난히 코스모스를 좋아해서 항상 그리움으로만 간직하고 살았는데 이제 서늘한 날씨가 되니 갑자기 코스모스 병을 앓았어.

우리 집에 놀러 온 KOICA 간호사 아가씨가 우연히 그 말을 듣고 한국 코스모스 씨를 가져왔어.

제법 더운 이곳에서 서늘해지니 한국의 코스모스가 힘차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삐우라의 짧은 가을은 한국 코스모스로 채우고 싶어.


이틀 동안 산타 로사 데 리마 연휴가 지나고 거리는 다시 활기를 띠고 있어.

오늘은 열무 씨앗을 뿌리러 친구 농장에 갈 거야.

열무가 파란 잎이 돋아나면 내 그리운 사람들과 같이 맛있는 열무김치 비빔밥을 해 먹는 상상을 해.

네가 삐우라에 오면 활짝 웃는 맛있는 찬치또를 구워줄게.

그날이 빨리 오길 기다리면서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오는 미소에 입을 못 다물고 뿌옇게 보이는 열무 씨앗을 뿌렸단다.


삐우라에서 누나가 김치찌개를 끓여준 것이 감히 말해서 신의 경지였다.

한국에선 널려있는 김치가 외국 살다 보면 없는 재료가 많아 늘 맛이 뭔가 부족하다.

유빈 누나는 김치 없이 배추로만 김치찌개 보다 더 맛있고 담백하게 끓이는 재주꾼이시다.

게다가 지구 반대편 잉카의 나라에서 고추장과 올리브기름에 비벼 먹는 열무비빔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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