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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r 22. 2024

페루의 국민 영웅 맘보 박


삐우라 빠이따 항에서 중장비와 자동차를 내려주고 유빈 누나와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다.

우리 눈에는 실체가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가슴에 남아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기고 누나의 항구를 떠났다.

세상엔 무엇 하나 의미가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삐우라였다.

"잘 있거라 항구여,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마도로스는 간다."

배 선수를 남태평양 쪽으로 돌려 리마의 관문 까야오 항을 향해 항해하며 우리의 'HAPPY LATIN' 호 선원들은 또 일상으로 돌아간다.


뻬루에는 존경받는 대단한 한국인이 있다고 들었다.

맘보 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박만복 감독이 그렇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에게 월드컵 4강이라는 멋진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는 선수 시절 잘 알려지지 않고 잡초처럼 커온 사람이었으나 지도자로서 그의 리더십은 정말 대단했다.

국가 대표 감독으로서 뚜렷한 목표를 제시했다.

다소 무리해 보이는 목표치를 설정함으로써 선수 개개인의 잠재 역량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는 선수들을 끝까지 믿었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기본에 충실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체력과 스피드이다.

그는 선수들의 체력 향상과 스피드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기초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고도의 전술 훈련이 가능하고 세계 강팀과 맞붙어도 해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한국 팀이 세계의 강팀과 싸워 이겼어도 어퍼컷을 날리고 'I'm still hungry.'라며 늘 승리를 갈망했다.


놀라운 카리스마를 인정받은 지도자는 히딩크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출신 지도자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그중 한 분이 바로 뻬루 여자 배구 대표 팀 감독을 지낸 박만복 씨다.

뻬루의 히딩크라고 할 수 있는 박 감독의 지도력도 가위 전설적이다.

1974년 처음으로 뻬루 여자 배구 국가 대표를 맡은 그는 팀을 세계적인 강팀으로 키워나갔다.

그는 선수들이 체력이 강하고 유연한 데 반해 상대적으로 약한 정신력과 수비 능력을 강화하는데 훈련을 많이 했다.

그 결과 국제 대회 참가에만 의의를 두었던 뻬루를 세계 정상급으로 키워 1982년 세계대회 준우승, 1984년 LA 올림픽 4위, 1987년 세계대회 전승 우승을 했다.


그때까지 뻬루는 올림픽에서 두 개의 메달을 땄었다.

뻬루에는 서핑으로 세 번이나 세계 챔피언에 오른 소피아 라노비치라는 선수가 있다.

그녀는 서프 보드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국민 영웅이었다.

페루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녀의 영광스러운 삶을 동경하여 거친 파도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리마 앞바다에서 훈련한다.

파도 밭에서 몸을 가누기도 버거울 텐데 그 파도가 칠 때 보드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잡고 어울리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다움과 함께 감동 그 자체였다.

물론 그녀의 성공에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박 감독의 지도력은 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뻬루는 쿠바 대신 참가한 브라질을 간단히 3―0으로 이기고, 두 번째 중국과 마지막 세트에서 9―14로 밀리며 벼랑으로 내몰렸으나 일곱 점을 연속 득점하며 대역전극을 펼쳤다.

미국과의 다음 경기도 두 세트를 먼저 내준 뒤 3―2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준결승 상대는 일본.

그동안 세계를 여러 번 제패했던 일본과도 풀세트 접전 끝에 마침내 결승 진출.


금메달을 놓고 소련과의 마지막 승부.

지구 반대편 뻬루 시각으로 새벽에 경기가 열렸지만, 장한 뻬루아나의 모습을 지켜보려고 수많은 국민들이 가슴을 졸이며 경기를 지켜봤다고 한다.

1세트 15―10.

2세트 15―12.

3세트 중반까지 뻬루는 파죽의 기세로 펄펄 날며 12―6으로 이기고 있었다.

박 감독은 결승전까지 같이 연습하며 한 번도 경기에 나오지 못한 두 명의 선수가 눈에 밟혀 선수교체를 하기도 했다.

금메달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노련한 소련 감독은 이왕 진 게임이라 생각하고, 연속해서 작전 타임을 걸며 뻬루 선수들을 맥 빠지게 했다.

쫓는 자보다는 쫓기는 자의 심리가 더 불안한 모양이다.

정상을 많이 밟아본 경험이 있는 것  또한 이런 대목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가 보다.

뻬루의 낭자들은  세계인이 지켜보는 큰 경기인 올림픽 결승전에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세트 15―13, 4세트 15―7로 소련에 두 세트를 내주고 맞은 마지막 세트.


그동안 열심히 응원했던 한국 팬들은 더 힘내라고 열화와 같은 응원을 했다.

운동해 본 사람이나 열정적으로 응원해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관중들의 응원 소리는 정말 머리칼이 쭈뼛 서고 가슴이 메지 않던가?

뻬루 선수들은 감독의 모국인들이 열렬하게 응원하는 것에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어 코트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단 한 점만 더 따면 승리를 확정하는 고비를 피차간 여러 번 무위로 돌린 뒤 15―14 뻬루의 리드.

그러나 피를 말리던 뻬루의 연승 신화는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승리의 여신은 소련의 손을 들어 연속 3득점으로 17-15, 세트 스코어 3-2로 소련의 금메달.

소련 선수가 마지막으로 강하게 때린 공이 뻬루 진영 한가운데 떨어지자, 경기장에는 아쉬운 한숨 소리가 터졌고 적막이 흘렀다.


연이은 풀 세트 접전으로 승자고 패자고 할 것 없이 완전히 탈진한 양 팀 선수들은 모두 바닥에 널브러졌고, 우리 의료진은 선수 구호에 여념이 없었다.

시상식을 제시간에 맞춰 진행하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쉬움에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중들을 향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한 뻬루 선수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에 묻혀 박 감독을 목말 태우고 체육관을 돌았다.

6.25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왔던 뻬루와 우리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따낸 값진 은메달이었다.

우리 대한 낭자들은 조별 리그에서 동독에 한 번 이기고 나머지 경기는 열심히 뛰었으나 아쉽게도 다 져 끝에서 일등을 했다.


그 후에도 박 감독은 팀이 어려울 때마다 자진해서 대표팀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당시 뻬루 대통령 관저에 사전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뻬루에서는 맘보 박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꼬레아노에 대한 호의가 대단했다.

맘보 박이 광고로 나온 제품은 아주 잘 팔린다나.

예전에 필리핀에서 농구의 신동파라고 하면 필리피노들이 열광하였듯이 뻬루에서 맘보 박을 말하면 페루비안과 금방 친해질 정도로 그의 인지도는 절대적이다.


뻬루아노에게 그들도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주었던 꼬레아노 맘보 박의 신화는 아직도 그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 그들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배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장한 대한국민이 세계 도처에 대단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마도로스 또한 그들의 흔적을 듣고 느끼며 지금도 세계가 좁다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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