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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03. 2024

한국인 부인을 너무나 사랑한 아르헨티노


누구에게나 운명이란 것이 있을까?

살아오면서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만남이 이루어지고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삶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언니~ 오늘도 지금 열 바퀴도 넘겠다. 어떻게 해?”

“그러게. 아는 사람이라도 보면 어쩌라고...”

아르헨티나에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에게 암울한 일이 닥쳤다.

집안의 가장이신 아버지가 과로로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었다.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가족들이 아버지 병간호에 매달렸는데 좋아지지 않았다.

꼼짝할 수 없이 누워있는 아버지를 가족들이 교대로 병시중을 수밖에 없었다.


그 병실에서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보호자 없이 혼자서 같은 병실에 누워 있던 한 현지 청년이 도움을 요청하였다.

약 좀 타다 줄 수 없느냐고.

스페인어에 서툴렀던 그녀였지만 눈치로 알고 약을 타다가 아픈 청년에게 갖다주었다.

그냥 그렇게 병실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뿐이었다.


그 병원에서 아버지를 더 치료할 수 없어서 퇴원하고 집에서 누워있게 되었다.

그동안 병원비를 내기 위해 이민 와서 업으로 삼아 일하던 공장의 기계들도 곶감 빼먹듯이 팔다 보니 몇 대 안 남은 기계로는 그나마 공장을 돌릴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말도 안 통하는 이국에서 말이다.


앞을 알 수 없는 그런 우울한 나날 중에 밖에 나갔다가 병원에서 만났던 그 청년과 우연히 공원 부근에서 마주쳤다.

그의 집도 근처였는가 보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의사의 지시대로 운동을 매일 해야 했던 그 청년은 그녀와 종종 공원길을 산책하는 횟수가 잦아지게 되었다.

스페인어를 빨리 배워야 했던 그녀에게 그 청년은 좋은 선생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먹고살위해 공장이라도 팔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공장을 헐값에 정리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백구촌에 있는 작은 집을 얻어 이사했다.


아직 시집도 안 간 이 동양의 아가씨에게 콩깍지가 낀 그 청년은 혹시나 만날까 차를 끌고 그녀가 이사 간 동네를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이사한 곳에 한국인들이 많이 사니까 혼삿길 막힐까 봐 절대로 찾아와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였는데 그 청년은 그저 밖에서만 맴돌길 며칠째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그녀 동생의 눈에 띄었던 것이었다.

“언니~ 불쌍한 데 나가 봐라.”

“아니 이 늦은 밤에 현지인을 만나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니?”

두 자매가 안타까운 마음에서 할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어둑한 저녁에 대문 밖으로 나왔다.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카페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가자, 그녀들을 발견한 청년이 뒤쫓아 와서 그곳 구석진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청년은 울먹이면서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다고 사랑을 고백했다.


이런 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예쁘장하고 한국에서 나름대로 잘 나간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는데 부모님 따라서 낯선 외국으로 이민 오니 말이 통하지 않아 자기 전공도 살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가세가 기울어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건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나이가 찼으니, 시집이라도 가야겠는데 그동안 혼담이 오가던 집안들도 냉담해지고 하물며 자식 딸린 홀아비도 그녀를 외면하는 실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온갖 정열을 다 쏟아 다가오는 핸섬한 현지인 청년.

그는 신비스러운 동양의 아가씨를 알고 나서 한국에 대한 뉴스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한국의 역사가 오천 년도 넘는다는 사실에 자기 나라의 백 년에 비하면 엄청 대단한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이라면 껌뻑 죽는 꼬레아 마니아가 되었다고 했다.


그 청년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공세에 마음의 문이 열린 그녀는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 신혼여행 갔던 중의 일화 하나.

마르 델 라따의 긴 방죽을 따라 드라이브하고 있을 때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방죽 끝까지 가서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중 세 명이 거기까지 걸어왔단다.

그래서 말을 해보니 그곳에 입항한 한국 화물선의 선원이었다.

부인의 고국 사람들이 반가워서 신랑이 그들을 태우고 시내를 구경시켜 주었단다.

사실 선원들이야 허구한 날 바다만 보고 사는데 육지 구경시켜 주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선원들도 친절에 고마워서 배 구경을 시켜주고 한국 부식도 나누어주었단다.


그중 한 청년이 이 신혼부부에게 선물로 시계도 주었다는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벽에 걸어놓고 보고 있다고 한다.

그때 그 부부가 선원들에게 피자를 사주었는데 그 청년들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향이 생소한 치즈와 토핑은 잘 못 먹고 빵만 먹었다나.

그러고는 배를 나와서 카지노에 간다고 하고 부부는 떠났다

나중에 그 배 선원 여럿이서 그 카지노에 놀러 왔다고 했다.

그중 벽시계를 선물했던 청년이 카지노를 처음 하던 중 소 뒷발질에 쥐 잡는다고 돈을 조금 땄다고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다 잃었고 그래서 그 청년이 한턱냈단다.


그 남편의 한국사랑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주위에서 한국인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만사 제치고 자기 능력껏 도와주어야 직성이 풀렸다고 했다.

마누라를 사랑하면 처가 말뚝만 봐도 절한다는 한국 속담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현지인이었다.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시누이들이 말하는 것을 부인이 못 알아들었다 싶으면 정색을 하고 누이들에게 말을 천천히 알아듣게 하라고 하며, ‘너희가 한국을 알아? 엄청난 역사를 가진 나라의 대단한 여자와 사는 이 행복을 니들이 어떻게 알겠니?’라며 한국인들이 오천 년 역사를 가진 대단한 민족이라고 수없이 말하다 보니 그 주변의 많은 현지인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차츰 좋아졌다고 한다.

총명한 그녀 역시 매사 남편을 위해 코드를 맞추어 살면서 현지 음식을 직접 만들고 아사도와 피자도 그가 좋아하는 식으로 구워내는 등 시어머니 음식에 길들은 그의 입맛에 오히려 그녀가 해주는 음식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일은 참 알 수 없는 것.

그 부부의 행복도 영원하지 못하고 몇 년 전에 두 아이를 남겨놓고 부인이 많지도 않은 나이에 세상을 먼저 뜨게 되었다고 한다.

혼자 남은 그는 진정 사랑했던 아내의 혼을 자녀들에게 심어주고 싶어서 한국말을 공부하게 했고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곳에 자녀들을 보내 배우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대학생인 자녀들이 한국어 통역도 하고 사물놀이 공연 같은 것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공연 무대에도 선다고 한다.


침대 문화보다는 한국의 온돌을 더 좋아하고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는 것보다 젓가락질을 더 좋아하는 그 남미인이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부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때 마르 델 플라따에서 신혼여행 중에 만났던 부산 해운대가 고향이고 배의 꼬시네로로 일했다던 그 청년, 헤어지고 약 사 년 후 미국 뉴욕에서 전화가 와서 지금은 피자도 잘 먹는다던 그 청년의 소식을 알고 싶다고 했다.

자기도 오래전 한국 방문했을 때 그 청년의 집에 전화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어찌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렇게 한국인 부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살고 있어도 너무나 그리워하는 그를 보면서 이 다문화 시대의 진정한 사랑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린 것은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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