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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04. 2024

우루과이에서 전설 같은 이야기


내가 아는 L 사범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사실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남미를 부정기로 다니던 외항선을 탈 때 동료 선원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조금 와전되었을지도 모른다.


때는 바야흐로 삼십여 년도 더 전이었다.

신혼이었던 L 씨가 독일에 취업 나왔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고심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고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기에 남미까지 흘러 들어갔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남미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으나 그 당시 수중에 가진 돈도 많지 않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러가고 급기야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노잣돈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벙어리 신세라 공원에서 사람이 안 보면 비둘기가 쪼아 먹고 있는 빵조각을 빼앗아 주린 배를 달래고 물로 배를 채우고 공원에서 자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사람이 아무리 막다른 길에 몰려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그런 계기가 될 일이 이 불쌍한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러던 어느 날 낡은 옷 가방을 베고 해 저문 박물관 옆 공원 벤치에 누워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다가 주위에서 웬 여자 비명이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가 고파 힘이 없어, 그냥 누워있었다.

그런데 점점 여자의 비명은 커지고 주위에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 나는 곳으로 가 보니 건장한 청년 세 명이 산책 나온 아가씨 한 명을 가지고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이 세뇨리따는 다급하여 ‘세뇰, 아유다메 뽀로 파보르!(아저씨,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치고, 이 왜소한 한국의 아들은 덩치로도 상대가 되지 않고 숫자도 열세 아닌가.

불량배 중 한 명이 다가와 꺼지라고 위협을 하는 걸 사타구니를 세게 걷어찼다.

뭐 다 아시다시피 제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도 급소를 맞으면 되게 아프고 힘을 쓸 수가 없다.

나머지 두 명이 욕을 하면서 달려들어 이 불쌍한 한국인을 조 패는데 어렸을 때 태권도를 좀 배웠던 이 양반은 몸을 웅크리고 맞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또 한 놈 급소를 정확히 걷어차니 이 인간 또한 괴성을 지르며 나자빠지지 않는가.

셋 중에 둘이 신음하며 누워 있으니 나머지 한 명은 당연히 전의를 상실하기 마련, 제 친구들을 더 불러오려고 줄행랑을 쳤다.

후환이 두려워 이 한국인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는데 아가씨가 뒤따라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이 같이 도망치다가 독립광장 큰길 밝은 곳으로 나와서야 아가씨는 제 갈 길 가라 손짓하고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누울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우두커니 서서 뭔가를 생각하던 이 아가씨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옷 가방도 놓고 오고 딱히 갈 데도 없어 뭔 일인가 쭈뼛쭈뼛 따라갔더니 스페인 풍의 고옥으로 들어갔다.


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의 부모는 이 가련한 한국인 노숙자에게 고맙다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안 통하는 말로 손짓발짓하다가 일단 먹을 것 챙겨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이튿날, 그녀의 아버지가 태권도할 줄 아느냐 묻기에 당신 딸이 보지 않았냐고 했더니 자기 나라 뽈리시아에게 태권도를 가르쳐달라나.

그녀의 아버지가 그 나라 경찰 간부였다.

이렇게 경찰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어 제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군인과 대통령 경호원들도 가르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다 보니 제자들이 수없이 늘어나 그 나라 요직에 두루두루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나라 육군 장성이 자기 스승인 L 사범에게 식사 대접을 하면서 세뇰도 결혼해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사실 한국에 아내가 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며 그런데 왜 데리고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나라에서 경찰과 군인 가르치는 사범 노릇 하고는 있지만, 사실 여권이 있나, 영주권이 있나 불법체류자 신세인데 말이지.


그때 그 나라는 군부의 입김이 무척 셌던 시절이었다.

참모총장이 별 하나인 나라에서 육군 장성이 나서 자기 사부님 영주권 처리하고 부인 초대하는 일쯤이야 누워서 먹기지.

어느 날, 그 장성이 L 사범에게 공항에 같이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별 판을 단 차를 타고 공항에 따라갔더니 의장대들이 늘어서 있고 군악대가 귀빈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높은 사람이라도 오는 모양이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장성과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럽쇼, 비행기 트랩을 밟고 웬 한복 입은 아줌마가 다소곳이 내리지 않는가.

군악대의 팡파르 연주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 의장대 이를 통과하는 여인의 모습이 낯에 익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니, 저거 내 마누라 아냐?”

혼자 눈을 비비며 아무리 봐도 꿈속에 그리던 낯이 익은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보여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고 뛰어가서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었다 웃었다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 장성과 L 사범이 예전에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었던 그 세뇨리따의 아버지인 경찰 대빵 등 그 나라 군경 요직에 있던 제자들이 일제히 거수경례하고, 그 옆에는 그 아가씨가 감격해서 환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 옆에 처음 보는 한국인 꼬마 하나가 서 있는데 L 사범을 많이 닮았다고 했다.

나이가 L 사범 한국 떠난 햇수와 같았다나.

한국을 떠날 때 임신 사실도 몰랐던 아들이었다.


타던 배가 몬테비데오 항에 입항했을 때 소문만 듣던 L 사범의 도장에 놀러 가니 벽에 그 나라 신문에 사범님의 일거수일투족과 사진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대통령이나 연예인 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후 우루과이에서 그분을 두 번째 만났을 때 내 손을 부둥켜 잡으며 반가워하던 L 사범님의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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