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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15. 2024

가을 전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갈 데가 정해지지 않은 배의 다음 항구는 어디지.

어디에 가야 지친 마음을 쉴 수 있을까...


숯 먼지에 고생하는 선원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쌍시옷과 함께 튀어나온다.

1층 화물 당직실에서 마스크를 쓴 일항사가 툴툴댄다.

"젠장 숯 두 번만 실었다가는 배고 폐고 다 아작 나겠네."

갑판장이 대꾸한다.

"이럴 땐 가을 전어를 구워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면 싹 풀리데..."


전어 이야기가 나오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갑판부원들 피로도 풀어줄 겸 입을 열었다.

"저기, 아직 밥때도 멀었고 아는 형님이 전어로 떼돈 번 이야기가 있어요."

"조 국장 또 뻥치려고 그러지. 암튼 재미없으면 맥주 한 박스 내소."

일항사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린다.

" 아는 형이 큰 거 한 건 할 거 없나 하고 늘 머리를 굴리며 사는 분이 계세요."


가을 전어 굽는 고소한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말이 있는데 니들이 전어 맛을 알아?

산 놈은 회나 무침으로 먹고, 전어밤젓과 함께 소금구이해서 머리채 씹어 먹으면 술안주로도 기가 막힌다.

전어는 해수 온도가 내려가면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우리의 미식가 형님께서 전어 축제를 한다기에 친구 한 명 꼬셔서 대천 바닷가 아는 횟집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

모두 이 앞바다에서 잡은 자연산이라고 둘러대는데 정확한 건 알 수 없고 암튼 바닷냄새와 함께 묵는 전어회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시원한 대천 막걸리에 회를 먹다가 구운 놈도 젓가락을 대 보고, 곁들여 나온 다른 해산물 먹느라 정신이 팔려 대화가 필요 없었다.

횟집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으로 북적댔는데 고등학교 동창인 주인이 마침 손이 좀 한가해졌는지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님 자리로 와서 반색했다.

서로 인사를 닦고, 막걸릿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거나 동창들 근황에 관해 말하다가 전어 이야기가 나왔다.

하긴 모처럼 외출해서 대천까지 전어를 먹으러 왔는데 당연히 오늘의 주인공은 전어지.


올해는 자연산이 풍어라 전어 양식장이 다 망하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때 형 눈이 갑자기 반짝했다.

횟집 친구 이야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전어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들었다.

맛있게 먹고 계산한다고 미적미적하니 동창이 멀리서 왔는데 그냥 가라고 한다.

그런다고 계산도 안 하고 나오다니 뒤통수가 가렵지 않았을까?

는 길에 횟집 친구가 이야기하던 근처 바닷가에 있는 전어 양식장에 찾아갔다.

양식장 주인을 만나보니 완전 사색이었다.

전어를 kg 당 만 원은 받아야 사료비, 인건비와 각종 경비 제하고 남을까 말까 하는데 자연산 전어가 엄청나게 잡히니 양식 전어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며 한숨을 푹 쉬고 오소리라도 잡으려는 듯 애꿎은 담배만 퍽퍽 피워댔다.

전어 출하 시기가 지나서 많이 먹기만 하고 크지도 않아 하루 사료비만 몇백만 원이 날아간다나.

그렇다고 산 놈을 굶겨 죽일 순 없고, 출하할 게 40t은 족히 될 건데 킬로에 오천 원이라도 사 갈 사람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팔겠다고 한다.

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콜!' 했다.

순박해 보이는 양식장 주인은 큰 눈을 껌뻑이더니 담배꽁초를 발로 밟아 끄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오케이 했다.

은 양식장 주인이 받을 금액 2억을 친구의 어음 한 장을 빌려 그 자리에서 써주었다.

주인이 '웬 어음이냐?'라고 묻자, '한 달짜리니 걱정하지 말라' 하고 양식장 전어를 인수했다.

그리곤 집에 들러 필요한 것을 챙겨 양식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며칠 동안 고기밥은 주지 않고 밥만 먹으면 양식장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어가 물 흐르는 방향으로 떼 지어 거슬러 올라가면서 입질을 했다.

밀물 때는 양식장 위쪽의 수문이 열려 바닷물이 들어오고 썰물 때는 자동으로 위쪽 문이 닫히고 양식장 아래쪽에 있는 배수문 위로 넘치는 해수가 저절로 빠져서 양식장 물이 순환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형님은 사료를 전어에게 안 주고 썰물 때 바다로 열댓 포대씩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추석에 쓸 고기 배를  척 빌리고 어부를 수배했다.

때가 때인지라 한국인 어부는 당연히 구하기 힘들었고, 명절에 하릴없이 쉬어야 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일당 거금 십만 원에 섭외했다.


추석날 이른 새벽, 썰물 끝나갈 때 양식장 배수구 흙벽을 포클레인으로 제쳐버리며 남아 있는 사료를 모두 배수구에 쏟아버리고 키우던 전어를 다 풀어줬다.

그리곤 일당 선원들과 배를 타고 대천 앞바다로 쏜살같이 갔다.

잠시 기다리다가 밀물이 거침없이 밀려드는 바다를 보니 사료를 먹으려고 밀려오는 자연산 전어와 떠내려오는 양식장 전어들로 물 반 고기 반으로 온 바다가 하얗게 변해 전어 배에서 그물로 잡은 것이 무려 100t 가까이 되었다.

양식장에서 풀어준 것이 약 40t인데 며칠 동안 사료 맛을 들인 대천 앞바다의 전어와 사료 냄새를 맡은 돔과 연평도 조기들까지 모두 양식장 수문 근처로 몰린 것이다.

추석 명절이라 출어하는 배나 불법조업을 단속하는 공무원도 없어, 모두 자연산으로 둔갑한 전어를 kg에 이만 원씩 빵빵하게 받았다.

돔, 조기와 잡어는 자연산이니 값을 실하게 받은 건 물론이고...

남의 어음으로 한 달짜리 2억 끊어주고, 일주일여 만에 현금을 20억 넘게 챙긴 것이다.

물론  친구에게 잔돈 몇 푼 주는 걸로 입 싸악~ 닦았다.

역시 봉이 김 선달도 울고 갈 대단한 뺀질이 형님이시다.


숨소도 안 고 듣던 선원들이 이야기를 마치자, 감탄 소리가 절로 나왔다.

"햐~ 2억 어음 주고 20억 현찰을?"

여기서 우리의 일항사가 빠지면 안 되지.

"역시 우리 조 국장님은 뻥의 대가셔. 재미있게 들었으니 내 맥주 한 박스 내리다."

갑판부 선원들의 환호성이 터지고 'HAPPY LATIN' 호의 숯가루는 여전히 우리 콧구멍을 꺼멓게 만든다.




쿠바 아바나에서 뭔 건수 하나 없나 하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여기저기 찾아 헤매헤밍웨이도 선착장 까페떼리아에서 운명의 어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를 만난다.

푸엔테스는 오십여 일 동안 아무것도 못 잡다가 큼지막한 고기를 잡아서 오던 길에 상어를 만나 모두 잃고 돌아온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무용담처럼 말했었다.

그걸 듣고 필 받은 헤밍웨이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되냐고 물었다.

어부는 이 술값만 내주면 O.K라 했다.


그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써 '노인과 바다'가 나왔다고 한다.

헤밍웨이 특유의 간결한 묘사, 바다에 대한 동경과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명구가 떴다.

그런데 이 소설이 대박 나자 헤밍웨이가 나중에 찾아와서 자기 성의라면서 2만 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엄청난 금액이었으나 순박한 어부 푸엔테스는 이미 술을 얻어먹었기에 거절했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자기는 그 몇십 배를 벌었으니 받아도 된다고 말했단다.

그렇게 또 한 역사가 아바나의 선창가 선술집에서 먹고 마시다가 나왔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작품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고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이 되었던 그죽어서배고픈 쿠바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단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작가 지망생영감을 받으려고 아바나 페에서 한잔에 5불 하는 모히또, 쿠바 리브레 등 헤밍웨이가 평소 즐겨 마셨다던 칵테일을 맛보려고 매일 초만원이란다.

선한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니 이 또한 반가운 소식이다.

책에 쓰여있는 좋은 문장이란 작가가 그의 일생동안 운 좋게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거나 그가 평생 동안 실패한 사실이란다.

그래도 전자가 후자만큼 귀중하다고 헤밍웨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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