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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16. 2024

말뫼의 눈물과 조선 수주 1위의 한국

공포의 삼겹살


다음 항구가 정해졌다.

독일 함부르크와 브레머하펜 항에서 자동차와 중장비를 싣고 캐나다, 미국과 도미니카공화국에 풀어주란다.

오 뽀르또 항에서 숯을 다 하역하고 도선사가 탔다.

숯 먼지로 온통 검게 변한 'HAPPY LATIN' 호는 파일럿이 내항에서 도선을 끝내고 내리자, 선수를 북으로 돌려 항해하며 선내 외 물청소를 했다.

함부르크까지 1,300여 해리를 우리 배가 15노트로 나흘은 가야 한다.

북대서양의 싱그러운 바닷바람과 파도를 만나니 이제 숯가루로부터 해방되어 좀 살 거 같다.

청소가 끝나면 자동차를 싣게 선창의 카 덱을 내려 조립해야 한다.

배에서는 안전이 최우선이라 하우스 마린 한가운데에 빨간 글씨로 'SAFETY FIRST'와 'NO SMOKING'을 크게 써놓았다.

한바다에서 작업하다 선원이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배 안에서 치료할 수 없어 당사자고 책임자고, 모두 난감하다.


주방에서 저녁 메뉴로 숯가루 먼지를 희석하라고 삼겹살을 준비했다.

안 선장님이 수고했다고 헤네시 꼬냑 한 잔씩 따라준다.

향이 좋은 꼬냑이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하역 중 쌓인 피로가 좀 풀리는 듯 유쾌한 취기가 온다.


삼겹살이 언제부터 우리 국민 음식이 되었을까?

어렸을 땐 그냥 돼지고기 사다가 엄마가 양념해서 볶아주면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뿐이다.

80년대 소득이 늘고 육류 소비 또한 많이 늘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삼성 같은 대기업에서 돼지를 대량으로 키웠다고 한다.

그동안 식당에서 나온 잔반 먹인 돼지는 고기에서 냄새가 났으나, 사료 먹이고 위생적으로 키우면서 냄새 문제가 해결됐단다.

탄광이나 막노동하는 사람들이 영양 보충 겸 마신 먼지를 씻어낸다고 먹었고,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널리 보급되어 전국적으로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것 같다.

돼지고기가 중금속을 해독하여 배출하는 효능이 있다는 것이 연구논문으로 나왔다.

삼겹살을 많이 먹으니 부족한 삼겹살은 수입하고 남는 등심, 전지 부위는 수출하는 모양이다.

서양 사람들은 아침 메뉴로 세살 부위로 만든 베이컨을 즐겨 먹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침부터 삼겹살은 잘 먹지 않는 거로 알고 있다.

아니다, 전 천하장사 강호동 씨는 먹성이 좋아 아침부터 삼겹살 구워 먹는다고 소문났더라.

코미디언 김형곤 씨가 공포의 삼겹살을 자처하며 그 시대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돼지고기를 잘 먹는 중국에서 전 세계 돼지고기 생산과 소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삼겹살 생고기를 불판에 구워서 상추, 깻잎, 파절임, 마늘, 고추 등의 채소와 쌈장, 참기름 소금 등의 양념과 같이 먹고 난 후 밥을 볶아먹기도 하니 고른 영양 섭취에도 좋은 것 같다.

는 언제부턴가 상추쌈을 싸 먹지 않고 고기, 채소, 양념을 따로 먹어 각자 맛을 느끼고, 새우젓을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한다.

쌀밥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구황 작물감자를 얇게 썰어 익혀서 같이 먹는 것이 요기도 되고 좋다.

다른 나라에서는 기름 많은 삼겹살을 않는다고 한다.


당직 교대를 마친 일항사와 일기사가 사관 식당으로 들어왔다.

모두 반갑게 맞이한다.

일항사가 앉으면서 말했다.

"좌현에 현대상선 배가 하나 지나가데요. 통화해 보니 동기가 일기사로 타고 있더라고요."

"반가웠겠구먼. 어이, 지금은 우리나라가 조선 수주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지만 어디 처음부터 그랬나. 옛날에 현대 정주영 회장이 조선 불모지에서 큰일을 해냈지."


캡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60년대 말 정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포항제철에서 생산할 철을 대량으로 소비할 산업이 필요해 현대 정 회장에 조선소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1971년 정 회장은 초가집에 갯벌만 보이는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일본 조선소에서 얻은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영국에 갔다.

이미 미국, 일본은 한국이 조선소를 만든다는 것에 시기상조라고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은행에서 차관을 빌려준다고 했으나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에서 아직 배 만든 적이 없으니 선박 수주 계약서가 있어야 사인해 주겠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 씨배만 사러 다닌다는 정보를 듣고, 파격적인 가격으로 26만 t급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해서 차관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건설 인력 선배들이 고생 끝에 2년 만에 조선소와 배를 만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다 만든 유조선 한 척은 그리스에서 인수했으나 또 한 척은 문제가 많아 인수하지 않자, 현대가 맡아 코리아 배너 호로 운항해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상선이 생겼다.

정 회장이 차관 얻으러 다닐 때 5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 그림으로 관계자를 설득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스웨덴 말뫼의 대형 조선업체 코쿰스가 망해 정리할 때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1,600t을 옮길 수 있는 골리앗 크레인을 인수할 기업이 없었다.

그래서 현대중공업에 막대한 해체, 운송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팔았다.

말뫼에서 해체해 고철로 팔았으면 1불은 더 남았을까?

2002년 조선 도시 말뫼 주민들은 크레인의 마지막 부분이 해체되어 배에 실려 바다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없이 아쉬워했다.

스웨덴 국영방송은 그 장면을 장송곡과 함께 내보내면서 ‘말뫼의 눈물’이라고 했다던가.

현대중공업은 이 크레인을 싣고 와 조립해 다시 운전하는데 모두 220억 원이 들어갔단다.

이 크레인은 현대중공업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육상 건조 공법을 성공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현대 미포조선이 갯벌에 기적을 만들고, 실로 십여 년 만에 세계 신조선 수주 1위를 차지하는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스웨덴 정부는 신속히 한국에 지원 의사를 밝혔고 176명이 한국에 도착했다.

이는 의료지원 부대 중 처음이다.

스웨덴 적십자병원은 개원하자마자 부상군인과 민간인 환자를 는 등 전쟁 중에 인류애를 실천했다.

이들의 헌신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계속됐다.

스웨덴 의료진은 1957년 귀국 전까지 중환자들을 치료했고, 이에 따라 한국 의료 기술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눈물겨운 그들의 공로를 기리고자 기념비와 우표를 만들었다.

체류 기간 7년 동안에 파견된 의료진 수가 천 명이 넘었고 돌본 환자 수가 2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가장 오랜 기간, 가장 많은 의료진을 파견했던 스웨덴 의료진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그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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