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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17. 2024

위기가 기회가 된 말뫼의 웃음

율산해운 전설



'HAPPY LATIN' 호는 남희가 숨 쉬는 독일을 향해 푸른 물살을 헤치며 도버 해협을 지나고 있다.

도버 해협은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 사이 제일 가까운 거리가 30km 조금 넘는다.

맑은 날은 건너편 해안이 맨눈으로 보인다.

항해 중인 배에서는 아름다운 두 나라 해안이 다 보인다는 이야기지.

대서양과 북해를 잇는 안전한 항로이기에 많은 배가 지나다닌다.

해저에는 터널도 뚫려 차들이 다닌다.

우리가 항해하는 지금 저 해저 밑에도 많은 중생이 차를 타고 오가고 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해협 사이가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조오련 선수 등 많은 사람이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


대리점에서 전보가 왔다.

독일 엘베강 어귀의 파일럿 스테이션에서 도선사가 승선해서 함부르크 BLG 자동차 전용부두에 바로 접안한다는 내용이다.

전문을 타이핑해 캡틴이 있는 브리지로 올라갔다.

전보를 보고 나서 배 항로에 마주 오는 배가 없나 확인하고 캡틴이 물었다.

"국장, 전에 대한선박에 있었다고 했지요?"

"네, '코리안 아메시스트' 호를 탔었습니다."

내 대답에 전방을 주시하는 일항사를 힐끗 보며 캡틴이 말을 이었다.

"거기 한양호라고 있었지?"

"아, 제가 근무할 때 같이 승선하던 일기사가 한양호 타다 왔더라고요."

"1968년에 그 배 인수할 때 울산이 난리 났었어요. 지금은 십만 톤 넘는 배가 널려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25,000t급 최대 화물선인 한양호를 대농그룹이 이탈리아에서 들여와 박 통이 자녀 세 명까지 데리고 와서 명명식을 했소. TV, 신문에 나오고 대한 뉘우스에도 방영되고 말이야. 그 배를 율산해운에서 인수했지. 그 70년대 무서운 아이들에 대해 들어 봤소?"


캡틴의 물음에 일항사가 끼어들었다.

"아~, 당시 율산 모르면 간첩이었죠."

당시 KS라는 경기고, 서울공대를 나와 27살이었던 신선호 씨가 동창들과 율산실업을 창업해 불과 몇 년 만에 14개 계열사를 보유한 재벌로 성장해 한때 많은 젊은이의 우상이 되었다.

중동에서 넘치는 오일 달러로 건설 붐이 일어나 자재를 싣고 온 화물선은 많은데 부두는 작아 체선이 극심해지자 율산 관계자는 배 선실에 불을 질렀다.

하루 체선하면 수천에서 수만 달러가 날아가는데 그깟 방 한두 개 태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법은 화물선에 불이 나면 우선 접안시켰단다.

그다음에도 못 말리는 체선에 또 아이디어를 낸 게 월남전에서 용도 폐기된 상륙함 LST의 상륙 허가를 받고 영국 헬기를 임대해 육해공군 합동으로 화물을 하역하자 현지에서 대서특필 되고 그게 해운업계 전설이 되었다.

그러다 몇 년 안 가서 이런저런 이유로 부도가 나 망했다.


일항사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선장님, 잘 나가던 율산이 망해 정말 안타까운 일인데요, 제 생각은 신화고 뭐고 간에 무역이면 무역, 해운이면 해운 하나나 잘하지, 단돈 500백만 원으로 창업한 회사가 겁 없이 은행 돈 막 갖다 쓰면서 왜 문어발처럼 다른 거까지 욕심내다가 감당 못 해 망하냐고요. 일본 애들처럼 장인정신으로 자손 몇 대에 걸쳐 한 우물을 파면 얼마나 좋아요. 듣기로는 그리스 선주들이 호황 때 다른 데 투자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잘 꼬불쳐놓았다가 불황이 오면 그때 중고선을 헐값에 사고, 신조선 값 내려가면 새 배 발주하고 해서 유동성 위기를 겪지 않고 견실하게 선박회사를 이끌어 간다고 하더라고요. 전 우리나라 재벌들 그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캡틴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빈말이 아니고 그런 마인드라면 일항사를 선박회사 사장 시켜도 되겠네."

선교에 있는 모두 함박 웃었다.




백여 년간 스웨덴 말뫼를 떠받치던 조선소가 문을 닫고 실업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말뫼, 코쿰스의 골리앗 크레인은 해체 비용을 현대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넘어갔다.

이 사건은 세계 조선업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조선소가 폐쇄되어 수만 명의 실업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절망만 남은 말뫼는 그렇게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말뫼 시가 조선소 부지를 인수하여 건물을 지어 창업지원센터로 활용하고 신재생에너지, IT 산업 등에 과감하게 투자하면서 도시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말뫼의 상징이었던 세계 최대 골리앗 크레인이 있던 자리에 터닝 토르소라는 54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건축가는 조각품, 남자의 뒤틀린 상체(Twisting Torso)에서 영감을 받아 건물을 뒤틀리게 했단다.

건물은 9개의 5층짜리 강철 큐브를 조금씩 어긋나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형태이다.

아래 두 개 큐브는 사무실 이고 위 일곱 개 큐브는 주민 거주 공간으로 아파트 백여 채가 있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 전망이 죽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건물은 전부 재생 에너지를 쓰고, 쓰레기는 모두 재생에너지를 만드는데 보낸다고 한다.

친환경을 위한 시도가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도시 경쟁력이 된 것이다.

이제 말뫼의 랜드 마크가 골리앗 크레인에서 터닝 토르소가 되었다.

파리의 에펠탑이라든지 뉴욕 자유의 여신상처럼 작품성이 뛰어난 건축물 하나에 수많은 관광객이 모이고 도시를 살릴 수 있다는 훌륭한 사례이다.


2000년 덴마크 코펜하겐과 바닷길이 연결되는 외레순 다리가 개통되면서 일은 20km 떨어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하고 생활은 물가가 싼 말뫼에서 하는 사람이 많아져 도시의 인구는 다시 었다고 한다.

말뫼가 유엔환경계획의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면서 메이저 기업들이 말뫼로 본사를 이전하고 관광객이 증가하였다.

시에서는 어떤 산업을 끌어올지 고민하지 않고 젊은 세대가 공부하고 시민들이 일하며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래서 도시를 정비하고, 사회안전망을 잘 만드는 데 주력해 에코 도시로 다시 살아난 것을 ‘말뫼의 터닝’ 또는 ‘말뫼의 웃음’이라고 한다.

이제 말뫼는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힌다.

제조업으로 성장한 우리나라는 변화하는 세계의 트렌드에 어려워지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울었고, 이제는 위기를 극복하고 웃고 있는 말뫼의 선방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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