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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19. 2024

라 쿠카라차와 독일 기자


‘HAPPY LATIN’ 호는 함부르크에서 자동차를 실으려고 빈 배로 벨기에 옆을 지나가고 있다.

화물이 실리지 않아 밸러스트만 넣고 높이 뜬 배는 북해의 거친 파도와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갈 길을 열심히 고 있다.

바로  근처에서 승객과 자동차를 싣고 출항한 13,000t급 고속 페리가 자동차 출입문을 닫지 않고 항해하다가 엄청난 해수가 밀려 들어와 균형을 잃고 좌초했다.

근처에 있던 준설선이 그 배의 불빛이 사라진 걸 보고 항만 당국에 신고해 벨기에 해군에서 구조대를 보냈다.

266명은 구조되었으나 차례를 기다리던 193명은 영상 3도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저체온증 등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런 차가운 바닷물에서는 건장한 사람도 한 시간 버티기가 힘들다.

생존자 중 어떤 남자는 물에 허우적거리는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입으로 물고 헤엄쳐 둘 다 살아남아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안타깝게도 아이 엄마는 돌아가셨단다.


일과 시간 끝나고 저녁 식사 후 윙 데크로 나갔다.

매섭게 몰아치는 북해의 칼바람.

코끝이 시리다.

이런 차가운 바닷바람이 나는 좋아.

이제 조금만 더 항해하면 드디어 함부르크에 도착하는가?

후후후, 보고 싶은 남희.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면 가슴이 뜨거워져 세상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모양이다.

이미 어두워져 어스름한 바다를 보고 두 팔을 올려 정면으로 바람을 받는다.

어느새 긴 머리를 휘날리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안기는 남희.

익숙하고 풋풋한 북해 바다 향기가 차지만 싱그럽게 느껴진다.

가슴 설렘과 함께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울렁임.

멀리 갈매기 떼가 바다에서 무언가를 쪼아 먹는 것이 보인다.

청어 떼라도 만났을까?

한 바다에서는 갈매기 우는 소리도 반갑다.


남희에게 전화하려고 윙 데크에서 선실로 들어가다가 캡틴과 마주쳤다.

“어, 국장. 한참 찾았네. 내 방에 잠깐 갑시다.”

“네, 무슨 일 있습니까?”

내가 묻자 들어가서 이야기하잔다.

“일단 맥주 한 캔 하소.”

권하는 하이네켄 맥주 뚜껑을 ‘딱’ 소리 나게 딴다.

“마시면서 들어보라우.”

캡틴은 내가 고개를 돌려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 다시 입을 연다.

“국장, 스페인어 ‘라 쿠카라차’ 뜻을 알아요?”

“아뇨, 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라는 노래 제목이잖아요.”

내가 대답하자 캡틴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하하하. 그게 멕시코 혁명 당시 불렀던 민요인데 ‘라 쿠카라차’가 ‘바퀴벌레’란 스페인어요. 사실 ‘라 쿠카라차’의 그 신나는 멜로디 뒤에는 비참한 처지에 있던 멕시코 원주민들이 자신을 ‘바퀴벌레’에 비유한 슬픈 사연이 담겨 있소. 그런데 거, 사주부에 쿡 있잖소? 그 친구가 매일 아침 3타수 먹을 계란 프라이를 바퀴벌레 튀긴 기름으로 부쳐준다는데 알고 있소?”

‘저런, 그 이야기가 캡틴 귀에까지 들어갔구나.’

나는 안색이 변하면서 대답한다.

“안 그래도 주자와 아까 그 이야기를 했는데요. 쿡을 불러서 주의를 주려고요.”

캡틴이 목소리를 깔며 말한다.

“어떤 배에서는 싸롱이 싸롱사관 커피 타 줄 때 미운 사관 잔에 침을 뱉어 휘저어서 갖다준다더니만, 사이가 안 좋아도 먹는 음식으로 장난치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시말서 받아오고 한 번만 더 그러면 징계위원회고 뭐고, 바로 강제 하선시킬 거라고 단단히 주의를 줘요. 생긴 것은 멀쩡해 가지고, 원~.”

캡틴이 맥주 한 캔을 더 권한다.

“시말서 받고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내 말에 캡틴이 미소 짓다가 정색하고 말한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어디서든 칼잡이는 잘 다루어야 하네. 언제 엉뚱한 짓을 할지 몰라. 그런데 국장! 이제 곧 함부르크에 도착할 건데 뭐 좋은 계획이 있소?”

나는 다시 화색이 돌며 대답한다.

“네, 이번에는 우리 배 하역 스케줄을 봐서 제가 베를린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베테랑이 되니 방송 때문에 몸 빼기가 쉽지 않은 가 봐요.”

“그래요. 그런데 젊고 예쁜 아가씨가 너무 오래 혼자 있는 것 아냐? 무슨 증표라도 만들어야지. 어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라도 가서 영화에서 보듯이 둘이 반지를 주고받으며 언약을 한다든지... 하하하.”

“글쎄요, 커플 반지 하나 살까?”

나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선장 집무실에서 나왔다.


통신실로 돌아와 잠시 서 있다가 가벼운 설렘과 함께 위성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채 웃음이 가시지 않은 밝은 목소리가 대답한다.

“Guten Abend!”

“응, 나야. 잘 있었어?”

이어 까르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Nein, nein~ Moment!’라는 남희 목소리가 들린다.

‘뭔 일이래?’

“자기, 미안해. 아이~ 배 아파라.”

긴장한 내 목소리가 더듬거린다.

“무, 무슨 일이야? 이 에...”

“응, 나보다 어린 독일 기자 녀석이 자꾸 따라다니는데 그 애한테 짬 나는 대로 독일어 회화 배우고 있거든. 디따 웃긴다. 오늘 퇴근하고 슈퍼에 갔는데 경호원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카트를 밀어줬어. 귀엽기도 하고 고마워서 칭찬하니까 좋아서 나를 부둥켜안는데 며칠 수염을 안 깎았는지 까칠한 게 아주 죽음이다. 하마터면 지릴 뻔했다.”

“......”

“호호호. 지금 어디야? 자기, 왜 말이 없어? 듣고 있는 거야?”

“......”  


이를 어째...

대답할 말을 못 찾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속절없이 비싼 위성 전화비만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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