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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20. 2024

함부르크 입항 전날

엘베 강 등대


내일이면 독일 함부르크 항에 입항하기에 자동차와 중장비 실을 준비를 한 우리의 ‘HAPPY LATIN’ 호의 사관들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배에서 별 낙도 없는데 선원들이 먹는 것을 얼마나 밝혀요. 숟가락 놓기도 전에 다음 메뉴가 뭔지 궁금해하고 말이오?”

우직한 보통의 마도로스와는 달리 박학다식한 안 선장님의 달변이 시작되고 모두 웃으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전에 그리스 배 인수하고 항기사와 잠시 혼승으로 타고 있을 땐데 말이지, 얘들은 감자와 양배추를 많이 먹나 봐. 우리 한국 선원들이야 김치만 안 떨어지면 다른 채소로 반찬 투정은 별로 안 하잖소. 주자에게 양배추와 감자 좀 많이 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야.”

잠시 좌중의 초롱초롱한 눈들을 쳐다보며 아바나 시가에 불을 붙인 캡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조리장이 주부식 주문할 때 평상시보다 감자와 양배추를 훨씬 많이 시켰대요. 자기 깐에는 배려를 한 거지. 아, 그런데 부식이 올라올 때 양배추와 감자 양을 보더니 두 놈의 눈이 희뜩 돌아가더니만, 보따리 싸서 뒤도 안 돌아보고 하선해 버린 거야. 참, 내...”

항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럼 무단 하선 아닙니까?”

“그거야 뭐, 선주가 즈그 나라 사람이니까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하겠지. 양배추와 감자를 조금 먹고는 일 못 하겠다는 거야. 사실 서양 애들은 빵도 매 끼니 우리 밥 해 먹듯이 새로 만들어 먹더구먼. 돈도 싫다고 가 버리는 데 낸들 어쩔 거야?”


캡틴의 말에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이어서 기관장의 말이 이어졌다.

“양배추 말이 나오니까 걸프 전쟁 때 호르무즈에서 입항 대기를 하고 있을 때였지. 여기저기에서 회물선이 피격당했다는 뉴스는 나오는데 내가 타던 배가 접안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쌀이나 고기는 당장 문제가 없었고 김치가 떨어져 가네. 대리점에 물어봐도 배추를 못 구한대요. 두바이에는 있는데 멀고 비싸서 우리 선원들 부식비로 사 먹을 수도 없고요. 할 수 있나, 양배추를 사다가 주자가 김치를 담갔지. 선원들이 며칠은 그럭저럭 먹더니 부원 식당에서부터 구시렁대기 시작했어. 급기야는 성질 더러운 젊은 기관원이 밥 먹다 말고 양배추김치를 엎어 버린 거야. 쓰고, 질긴 이걸 먹고 어떻게 일하냐고. 조리장이 뭔 죄 있어? 성질이 나서 부원 식당에서 멱살 잡고 싸우고 난리가 났지. 아이고~.”


이야기가 길어지니 싸롱이 설거지를 마치고 와서 커피 한잔하실 거냐고 물었다.

모두 O.K. 하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기사가 말을 잇기를...

“저도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하역이 예정보다 두어 달 더 늘어져 배에 고기가 떨어졌거든요. 그래서 조리장이 대리점 직원과 선식에 가서 냉동고기 박스에 쓰여있는 한자 약어는 모르겠고, 보기에 소고기 같은데 디게 싸더래요. 그래서 선원들 소불고기 자주 해주려고 왕창 실었죠. 그 당시 중국 인민피 환율이 좋을 때니 물가 쌌잖아요. 그런데 소불고기 맛이 좀 이상한 거예요.”

기사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마시자 모두 재촉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항사가 물었다.

“아니 무슨 고긴데? 고기라도 실었나?”

기사가 눈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것이... 고기 색깔만 붉었지, 토끼고기였어요.”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이어 캡틴이 말했다.

“미쳐~ 그러니까 배에서 일주일 주메뉴가 소 돼지 닭, 소 돼지 닭, 생선 이렇게 돌아가는데 기사 탄 배는 토끼, 돼지, 닭으로 돌았구먼. 하하하~”

이어지는 기사의 어눌한 말.

“지금도 속에서 니글니글한 토끼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사관 몇은 웃다가 앉은자리에서 넘어갔다.


조용히 듣고만 있는 나에게 캡틴이 말을 붙인다.

“어이~ 국장! 오늘따라 말도 없고, 왜 그래?”

“예? 별일 없습니다.”

“얼굴에 다 쓰여 있구먼, 뭔 일인데?”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나에게 캡틴이 재차 물었다.


탁자 위의 먹다 남은 커피잔을 한쪽으로 치우고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말하기 좀 쑥스러운데, 아니 제 앤이 연하의 독일 기자하고 부비부비하고 난리예요.”

“흠~ 특파원 아가씨가?”

캡틴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면 무슨 짓을 한들 무슨 상관있겠습니까만, 하필 어제 전화를 했는데 그놈하고 좋아서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더라고요.”


모두 적당한 말을 못 찾아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자 캡틴이 나를 쳐다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한국 같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바쁘게 돌아가지만, 독일 같은 선진국은 거의 변화가 없을 걸세. 어제나 오늘이나, 뭐 또 내일도 마찬가지겠지. 우리 선원들도 바다에서 배 속도만큼이나 느린 삶을 살고 있지만 말이야. 그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도 한국에서 정신없이 팡팡 돌아가다가 독일에서는 좀 심심할 걸세. 어이, 국장! 그래서 애인과 어떻게 할 건데?”

“네, 일단 만나 봐야죠.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기관장도 혼잣소리같이 낮게 말했다.

“사람 천성은 잘 변하지 않지. 그런데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잖소. 정말이지 여자 마음은 남자들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야. 사랑은 상대적인 관계라 원만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언제 돌아설지 모르지. 국장이 잘 알아서 처신하겠지만...”

이 순간도 쉼 없이 엔진이 돌아가는 ‘HAPPY LATIN’ 호의 우현 멀리 엘베  입구등대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수많은 모래처럼 많은 사람 중에 남희를 만나 애달파하는 게 몇 년째인가.

우리 인연의 끝은 어디일까?

테레사의 연인이란 소설의 주인공처럼 끝이 닿지 않는 것일까...

독일의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도 다른 기술을 배우는 것처럼 공부해야만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고,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에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 같이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사람은 사랑과 소유,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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