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이나
지난주 두 번 면접을 봤다.
엄마의 요양보호사님 뽑는 면접.
우리가 시험관이기도 하고 수험생이기도 하는.
두 분의 요양보호사님께 시원하게 합격! 을 알려드렸는데 엄마는 두 번 다 떨어졌다. 불합격~
처음 오신 분은 우리에게 합격이라 해놓고 시작 전 날 집에 일이 생겨 못하겠다 했고 다음 요양사님은 처음 얼굴을 대했을 때부터 아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엄마 표현에 따르면 눈에 겁이 콱 드러났다고.
집이 크다, 난 그동안 방 한 칸짜리 집에만 다녀 이렇게 큰 집은 자신이 없다 하셨지만 어째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집에 방이 세 개지만 당연히 다 치울 필요도 없고 엄마 식사랑 산책에 더 비중을 두시면 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으니까. 두 분이 똑같이 되풀이했던 "어머니가 너무 정정하셔요"라는 말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지난달 병원에 닷새동안 입원하셨다가 퇴원해 집에 오실 무렵과는 정말 다르게 엄마는 다시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매서운 눈을 하고 앉아 계셨으니 저 양반을 요양보호하는 게 아니라 시집살이하게 생겼구나 하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간 건 아닐까 의심이 간다.
6월 말, 엄마가 뇌경색을 앓으셨다. 매일 하던 전화 목소리가 이상해 친정에 갔더니 한쪽 입이 내려앉아 있었다. 혀도 마비가 되어 발음이 이상하다고 어쩌다 내 꼬라지가 이렇게 됐냐고 우시는 엄마에게 양 팔 다리 움직여 보시라니 이상 없이 힘차게 흔들어 보이셨다. 뇌출혈은 아닌가 보다 하고 집 뒤 엄마 단골 한의원에 모시고 갔다. 선풍기를 하루종일 마주하고 있어 구안와사가 왔다고 하도 우기셔서. 항상 친절한 젊은 한의사는 꼼꼼히 여러 가지 물어보고 이래저래 해 보라시더니 혀까지 마비된 건 구안와사가 아니라며 빨리 큰 병원에 가서 MRI를 찍어 보라고 진찰료도 마다하고 우릴 내쫓았다.
남동생의 성화까지 얹어져 후다닥 뛰어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결국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엄마 MRI 사진엔 새끼손톱만 하게 하얀 점이 보였다. 이게 더 커질지 그냥 멈출지 모르니 바로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해서 난 느닷없이 코를 후비는 검사를 한 후 집으로 달려와 대충 짐을 챙겨 코로나가 여전히 진행 중인 시대에 병원에 갇혀 버렸다. 엄마랑 둘이.
면회도 불가, 간병인 외출도 불가, 환자가 병동을 나가는 것도 불가, 간병인이 교대하려면 코로나 검사를 하고야 가능한 데다 올케가 일을 하고 있으니 그것도 불가. (남동생이 자기가 휴가 내고 교대해 줄까 하고 물어서 다들 웃었다, 엄마랑 너랑 홧병걸리게? 하고)
울 엄마는 평생에 애 낳을 때 하고 무릎 수술할 때 빼곤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었다. 아픈 적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또 한편 아픈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를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뇌경색은 왔으나 말이 어눌한 거 빼곤 아픈 곳이 하나도 없으니 엄마에게 입원은 휴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침대가 불편하다, 옆 사람이 시끄럽다, 밥이 맛이 없다, 간호사 자꾸 들락거려 잠을 못 자겠다, 왜 넌 자꾸 늦게 자냐~~ 이 모든 불평에 일일이 설명을 해도 그때뿐 다시 도돌이표. 여기 열흘만 있음 내가 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쯤 의사가 크게 이상이 없으니 내일 퇴원해도 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닷새만에 난 바깥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온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ㅠ.ㅠ
딸내미가 다 돌봐드리는 입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엄마는 예전 같지 않았다. 혼자 제대로 지낼지 모르겠다는 말을 처음으로 하시면서 그동안 그토록 마다했던 장기요양등급심사도 받겠다 하고 그때까지 집을 돌봐줄 도우미도 오라 하라 하셨다. 다행이다 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진작에 이런 돌봄을 받았다면 지금 한꺼번에 겪는 변화가 덜 힘들었을 텐데. 저 마음의 충격을 어찌 견디시려나 싶어서.
그렇지만 울 엄마가 누구신가. 그 자랑스러운 평양여자!
한 달 가까이 아들 며느리 딸 사위가 들락거리면서 돌봐드리고 이럭저럭 적응을 끝내고 나니 다시 고집불통, 강직한 독립투사로 돌아오셨다. 그리곤 결국 면접에서 두 번 미역국을 말아 드셨다. 집 청소할 도우미이모를 오시게 한다니까 이깟 집 치우는 게 뭐가 힘들어 낯선 사람을 들이냐고. 할 일도 하나도 없구만 하는 익숙한 대사가 다시 튀어나왔다.
내일 다른 요양사님을 모시고 갈 테니 면접을 보자는 요양센터장 전화에 살려달라 했다. 저 좀 살려주세요~~ 미리 우리 집 환경을 다 얘기하시고 또 퇴짜 맞지 않게 마음이 넉넉한 분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 살려주세요~~
이런 일을 많이 겪었노라는 센터장은 마구 웃으면서 너무 걱정 말라했다. 울 엄마뿐만 아니라 이런 어르신이 정말 많고 자신의 친정엄마도 그러신다고, 니들 중 누구든 나랑 같이 살자고 졸라 고향집에 전화 걸기가 무섭다고. 우린 서로 안심을 하고 마음을 달래며 전화를 끊었다.
친절하고 세심한 한의사선생님 덕에 크게 나빠지기 않고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얼른 대학병원으로 가서 검사하라고 자기도 바로 따라가겠다 한 동생도 고마웠다. 자기가 교대도 못해준다고 바리바리 반찬이며 과일 싸서 보내준 올케도 고맙다. 닷새 내내 끙 소리 없이 잘 지내준 남편도 고맙다. 무엇보다 더 나빠지지 않고 그 정도에서 멈춰준 엄마의 병이 고맙다. 그러니 이젠 제발 엄마가 다음 면접 때 보들보들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해줬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덧, 이 글을 써놓고 엄마가 세 번째 면접을 봤다. 그리고 합격증을 받았다. 내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셨는지 웬일로 면접온 요양보호사님을 안아주며 진여사~~ 잘 부탁해요 그러셨다. 그리고 내일부터 오시기로 약속을 받았다. 제발 두 분이 서로서로 잘 적응해 따뜻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잉잉~~~
사진: 쪽팔려서 절대 지팡이 안 짚겠다고 고집하는 할머니를 보고 영국으로 출장갔던 손주가 일부러 찾아가 사 가지고 온 지팡이에 좋아하는 엄마. 지팡이가 멋있어서 그런지 손주 선물이라 그런지 마음을 돌리고 잘 짚고 다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