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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은 Jul 07. 2020

다정한 남편

포기하지 않는다면

 집 바로 뒤에 생활협동조합 유기농 매장이 있다. 길만 건너면 바로 여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린다. 살 게 많아서가 아니라 자꾸 잊어버려서. 달걀 사러 갔다가 싱싱한 열무에 정신 팔려 얼갈이, 홍고추, 쪽파 이런 것만 한아름 싸안고 온다든지, 쌀 사러 갔다가 할인해준다는 화장품 발라 보느라 딴짓하다 빈손으로 온다든지. 매장에 다시 들어가면서 '또 까먹어서~~' 그래도 직원들이 민망하지 않게 우리도 다 그래요 하면서 반가이 맞아주니 부끄러운 줄 모르고 슬리퍼 끌고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엊그제 샐러드 할 걸 사러 들렀는데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왜 남편 분은 같이 안 오셨냐며 말을 걸었다. 왜 갑자기 남편을 물어보지 싶어 돌아보니 다른 쪽에 있던 직원이랑 둘이 환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지난번에 같이 오셨을 때 남편 분이 회원님 이름을 얼마나 다정하게 부르시던지 완전 심쿵했어요" 

이게 뭔 소리? 

 "내 남편이 다정하게 날 불렀다고요?" 내 되물음에 그 직원은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체 만화 속 캔디의 별 박힌 반짝반짝한 눈으로 "네, 얼마나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은아~ 하고 부르시던지 제 가슴이 막 두근거렸어요. 참 좋으시겠어요" "아이구 이 얘기를 얼마나 하던지 두 분 가시고 나서 부럽다고 난리였어요" 곁의 직원도 맞장구를 쳤다.

 

 음~~~~~~~~~ 이게 웬 하늘과 땅이 거꾸로 될 소리란 말인가?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되도 안한' 소리는 내 생전 처음 들었다. 삼십 년이 훨씬 넘는 결혼 생활에 정말 피 터지게 (물론 심하다는 말이다. 피는 본 적 없다) 많이 싸웠는데 그중 적어도 30퍼센트 이상은 남편의 말 때문에 일어난 것이리라. 경상도 남자에, 삼 형제 맏이에, 초중고대학교를 통틀어 여학생이 없었던 환경까지 더해지고, 버럭 하는 성질까지 있어 난 남편 말버릇에 오래오래 고통받았고 지금도 심심찮게 도돌이표를 그리는데 '다정'이라,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니 반응이 좀 아니올씨다네 하는 기분이 들었나 보다. 집에선 안 그러세요? 한다. 


 "평생 후회했다우. 왜 내가 경상도 남자랑은 절대 결혼 안 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을까 하구요. 어찌나 무뚝뚝하고 말도 사납게 하는지 처음엔 저 사람이 왜 저리 화를 내나 했어요. 근데 그게 그냥 말이더라고~~ 어쩌고저쩌고~~" 감상에 푹 젖어 꽤 낭만적인 스토리를 상상했을 두 사람에겐 미안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어쨌든 우리 셋은 그 낭만적인 얘기를 진전시켜 사투리와 말투에 대해 마구 토론을 한 후에 바이 바이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집 현관에서 장바구니를 받아 주는 남편에게 '생협 직원이 이런 소리를 하던데' 하고 말해줬더니 '그래? 내가 그랬다고? 그런데 누군가 그 직원이?' 하면서 반색을 했다. 그래서 난 무심히 '웃기지? 그래서 웬 황당무계한 소리냐 그랬지, 정말 웃기잖아, 당신이 다정하게 라니~~ 사랑이 넘처더라던데, 하도 기가 막혀서 얼마나 무뚝뚝하고 어쩌구 저쩌~ ' 하다가 남편의 풀 죽은 얼굴을 봤다. 어? 이건 또 뭔 시츄에이션이람?  

 

 "왜 얘길 그렇게 하나, 나도 좀 잘 할라고 애쓰는데. 니가 맨날 들어 몰라 그렇지 옛날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졌다고, 니가 몰라 그렇지 다른 경상도 남자들은 이렇게 못한다. 섭섭하네~~ " 


 난 이 얘기를 남편이 귀담아들으리란 생각을 전혀 못했다. 말 함부로 한다는 얘기야 뼈에 새길만큼 들었을 테니 당연히 웃기네 하고 말 줄 알았다. 


 그런데 심각하게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도 타고난 성품을 어쩌지 못해 저지르고 싸우고 욕먹고, 하는 일을 수없이 되풀이했을 터 그 속도 편하진 않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속 깊은 곳에선 아이구 이 양반이 뭔 말 같지 않은 소릴 하는 거야? 그동안 함부로 한 말로 내 가슴속에 상채기 낸 게 얼만데 싶기는 했지만) 그런 세월 속에 나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조금만 화가 나면 훅 하고 튀어나오는 걸 얼른 집어삼키지도 못하고 후회를 했겠지.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누군가가 다정한 사람이라 칭찬했으니 아주 좋았나 보다. 그 마음을 모르고 정체를 까발려 놨으니. 


 세월이 무섭다. 그리 빳빳하고 사납던 사람이 그 칭찬 한 마디에 말랑말랑해져 서운해한다. 포기하지 않고 죽자고 싸운 대가를 얻은 건지, 나이가 들어 속이 쪼그라든 건지, 드디어 이성의 눈이 뜨여 니 죄를 니가 알렸다가 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섭섭하다며 꿍 하고 웅그리고 있는 남편 등짝이 어색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에게 사랑이 넘쳐 한 소리는 아니다. 천지가 개벽을 해도 아닌 건 아닌거지?



덧붙임.

작가 은희경씨가 인터뷰에서 한 말.

"결혼하고 나서 인생은 비루한 거, 뜻대로 되지 않는 거, 원칙대로 하면 손해보는 거라는 걸 하나하나 배웠어요. 그럼에도 결혼의 장점이 있다면 그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다른 면을 보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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