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초복 전날)
-닭이 작다, 이걸 누구 코에 바르냐?
-안 작아. 백숙해먹는 거 아니잖아, 삼계탕이지. 큰 닭 맛없어.
-문서방이나 김서방이나 그 장정들이 이거 먹고 힘이나 쓰겠냐?
-(뭔 장정?) 힘쓸 일 없어, 이 정도면 충분해.
-이게 인삼이라고~ 꼬라지 좀 봐라.
-그거 인삼 아니고 황긴데?
-어쨌든.
집으로 오는 길
-닭이 작은데.
-안 작다니까, 큰 닭은 맛없다고. 그 큰 닭을 어떻게 한 사람이 한 마리씩 먹어.
-왜 못 먹어. 덩치들을 봐라.
-엄마, 큰 닭 싫다잖아, 내가 삼계탕을 한 번 두 번 끓였어? 내가 싫다는데 왜 그래?
-니가 사양하는 거잖아.
헐~~~~
초복 아침
-너 뭐 하냐?
-청소하고 있어.
-지금 청소한다고? 그럼 언제 와서 삼계탕 끓이니?
-지금 8시 반이거든. 10시에 불에 올리면 충분해, 12시에 먹을 거잖아.
-괜찮을까?
-내가 찹쌀도 불려놓고 밤도 다 까놨고 닭도 손질 다 해놨잖아. 충분해.
-닭이 작아.
아이구 못살아.
친정에서.(오전 9시 반)
-닭이 작잖아.
-안 작다니까.
-작아. 괜히 니가 우겨서
-악~~~~~~~(속으로)
-엄마, 이거 두 시간을 끓여야 되는데 닭이 작으니까 1시간 반만 끓여. 그 시간에 맞춰 올게.
-알았다. 한 시간 반이라고.
-응, 11시 반쯤 불 꺼, 끓기 시작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닭이 아무리 봐도 작아.
다시 친정 (오전 11시 반)
-불 껐어?
-응. 벌써 껐지. 한 시간 끓였어.
-내가 1시간 반 끓이라고 했잖아.
-다 익었던데 뭘 더 끓여.
헐~~~~
상 차리면서
-봐, 이렇게 큰데 닭이 작아?
-정말~~ 끓이니까 커져 버렸네.
-내가 삼계탕을 이십 년 끓였어. 왜 말을 안 들어?
-니가 사양하는 거니까.
이십 년 전 친정 부모님이 40여 년 살던 곳을 정리하고 우리 집 앞 동으로 이사 오신 후로 초복이 되면 삼계탕을 끓여 대접하곤 했다. 아니, 처음엔 유명한 집으로 같이 먹으러 가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서빙하던 식당 아주머니가 왜 하필 이 바쁠 때 다들 나와 고생하며 드시냐고 한 소리에 정말 그러네 싶어 우리집에서 끓여 같이 먹곤 했다. 이 여름도 더위 잘 견디시라고. 그런 날은 아빠가 참 좋아하시며 달게 한 그릇 다 비우시곤 해서 친정 부모님께 해드리는 것 없이 받기만 하며 산 내가 유일하게 얼굴이 좀 섰다.
10년 전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좀 시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랑 같이 초복을 보냈는데 올해는 무슨 바람인지 엄마가 삼계탕 해주겠다고 와서 먹으라시는 거다. 솔직히 썩 반갑지 않았다. 엄마는 음식에 그닥 소질이 없다. 소질이 없는데 손만 크고 게다가 남의 말은 안 들으신다. 그래도 내년이면 구십이신 엄마가 해준다는 삼계탕인데 하고 그러시라 했는데. ㅠ.ㅠ
시간 맞춰 도착한 남편과 제부랑 넷이 드디어 삼계탕을 놓고 앉았다. 그릇 가득 차 있는 닭을 보면서도 작다 타령을 계속하시는데 닭 속 찹쌀은 푹 삶아지지 않아 덜 쫀득했고 밤은 반으로 쪼갰는데도 설컹거리고 국물이 덜 달다. 오랜만에 집 밥 먹은 제부만 한 그릇 다 비웠고 남편과 난 반만 먹었고 엄만 닭다리 두 쪽만 드셨다. 그래도 두 사위는 처가에서 마음 놓고 먹는 낮술에 즐거워했고 엄마는 텅 비었던 집안이 사람 소리에 와글거려 아주 즐거워하셨고 난 드디어 닭 싸움에서 벗어나 즐거웠다.
긴 식사 시간 후에 설거지 다 해놓고 과일도 먹고, 일어서 남은 삼계탕 반마리 씩이 들어 있는 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고생했다, 그런데 다음엔 그냥 우리집에서 해 먹는 게 낫겠다' 한다. 내 말이~~ 이게 몸보신을 한 건지 몸 축날 일을 한 건지 정말 모르겠네 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다. 나중에, 아주 나중이 되면 이 날이 참 그립고 내가 왜 그렇게 대대~~ 거렸을까 하고 후회할 거라는 걸. 그렇지만 엄마의 작다 타령은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