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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kim Feb 28. 2020

첫 번째 산맥

2. 호주에서의 나날들을 기억하며





울보의 직립보행



시드니에서 처음 구한 직장은 월남쌈 뷔페였다. 월남쌈도 팔고, 코리안 바베큐도 는 곳이었다. 나는 주로 뷔페 코너에 멀뚱히 선 채 재료를 지켜보다, 동날 때쯤 냉장고에서 몇 통을 가져와 채우는 일을 했다. 일주일에 많이 벌면 500불, 적게 벌 땐 300불도 덜 받았다. 250불 언저리를 손에 쥔 날, 나는 이미 한 차례 현타를 느끼고 있었더랬다.


여느 날과 같이 저녁 10시에 퇴근하여 뚜벅뚜벅 걸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반쯤 와갈 때, 내 옆을 쌩하니 지나가던 하늘색 자동차에서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느닷없 물풍선이 날아들어왔다. 물풍선은 나의 가랑이를 명중시켰고 나는 '소변을 참다 참다 결국 바지에 지려버린' 꼬락서니를 하고서 아주 큰 소리로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사장님께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다. 고작 300불을 손에 쥐고, 한국에서조차 하지 않았던 월남쌈 재료 채우기를 하며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게 물풍선을 맞는 꼴이라니.


갑작스레 일을 그만두게 된 나는 본격적으로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되로 마음먹었다. 카페 아르바이트가 하고 싶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나는  나라에서 몸 쓰는 것을 제외하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두 번째. 나는 거운 음식을 나르는데 소질이 없다. 셋째. 나는 남의 집 청소는 하고 싶지 않다. 명했다.


다행히 휴학기간 중 일 년정도 커피를 타본 경험이있었다. 여전히 나의 영어는 젬병이었으나, 마음씨 좋은 여자 사장님은, 인상이 좋고 한국에서 험이 있다 라는 이유만으로 오픈을 준비 중이작은 커피숍 바리스타 자리를 내어주셨다. 이 곳에서삼 개월 좀 넘게 일했던 것 같다. 주에 500불은 꾸준히 받고 있었고, 아침 일곱 시부터 딱 오후 세시까지만 하는 일이었으며, 집에서 기차를 타고 두 정거장, 나쁘지 않았던 조건이었으나 그만두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더랬다. 바로 사장님의 친한 동생. 그의 지나친 대쉬였다. 뚜둥.


 시드니에 십몇 년 전 이민을 온 자였는데,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지만 몹시 끈질겼던 것 하나만은 머릿속에 남아있다. 싫다고 오천 번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명목하에 굳이 굳이 따라오기도 자꾸만 라떼 아트를 가르쳐 준다고 옆에 들러붙어서는 사람을 들들 볶아댔다.


언젠가 한 번은 자기와 데이트를 하자며, 해보고 별로면 그때 포기하겠다 라는 기이한 염불을 외운 적도 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외적인 모습이 나에게 있어서 무매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데이트고 나발이고 간에 그에게 그 어떠기회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피해 일을 관두고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하지만 귀엽고 어렸고 또 강인했던 나는,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더욱더 근사한 카페에서 아주 실력 있는 바리스타로 성장 할 수 있는! 놓치면 절대 안 될 기회 따위라는 생각을 했고, 과연. 그 생각은 완전히 틀려먹었다.






캠시


나는 캠시 라는 동네에 살았는데, 이 곳은 우범지대였다. 내가 시드니에 오기 한참 전, 롱 롱 타임 어 고, 아주 아주 예전에는 한인 타운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들었다. 그 증거로 크지 않은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한인 식품점이 세 개나 있었고 한인 정육점이 두 개, 멋장이- 라는 이름의 옷가게가 동네 중심 거리에 위치하는 등 캠시에서는 1970년의 모습을 한 2014년을 볼 수가 있다.


캠시는 하수도를 끼고 잡은 동네라 지역 발전이 어렵다고 했더랬다. 집값, 투기, 부동산이라면 기를 쓰고 쫓아다니는 한국인들은 캠시를 내동댕이치고서 발전 가능성이 농후한 동네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서서히 빠지고 한국어 간판을 내 다건 가게 수 줄어들면서, 거친 삶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이 캠시를 주름잡기 시작했다.


세 번째 일터는 캠시에서부터 대략 시간 반 거리었다. 나의 쉐어 하우스는 역전까지 빠른 걸음으로 10분 거리였고 매일 아침 네시 반에 일어나 세수 양치를 하고서 다섯 시가 되면 문을 열 우범지대에 작은 발을 내디뎠다. 컴컴한 동네를 경보로 걸어 역으로 가면 시티행 기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기차가 나를 기다리진 않았다 내가 주로 기다리는 편이었다.)


노스 시드니로 가려면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했는데, 이 과정이 귀찮지 않았던 이유는 또 따로 있다. 노스 시드니는 단어 그대로 시드니의 북쪽 동네다.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벽돌집들만 무수 캠시와는 정 반대의 동네였다.


시드니 남쪽과 북쪽을 잇는 하버브릿지를 건너며 오페라 하우스 옆으로 뜨는 샛노란 해를 바라볼 때, 나는 꼭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이 그저 한낱 외국인 노동 자라는 걸 잊게 해주는 풍경이었다. 노스 시드니 역에 내려 높디높은 빌딩 숲 사이를 헤쳐나가 카페들이 와글와글 모여있는 사거리. 그곳에 나의 세 번째 일터가 자리했다.


처음엔 그 카페 보조 바리스타로 지원을 했었다. 그들도 흔쾌히 날 받아주었다. 받아준 줄 알았다. 산 넘어 산맥을 사는 나의 인생이 그런 식으로 술술 풀릴 일이 없다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처음 일하러 온 날 나 말고 다른 언니가 또 지원을 했고, 그 언니는 커피 경력 9년의 능력자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바리스타 자리를 속절없이 빼앗기고 캐셔 자리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더 큰 산맥이 자리했으니 바로 초등학생 때 유학 온 스테파니. 그녀였다. 시드니 최고 명문 대학을 다니 그녀를 내가 영어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결국 일자리는 필요했고 그게 카페였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나는 뜬금없이 주방 석에 둥지를 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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