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보조라는 직업은 정말이지 고된 자리다. 말이 보조지 거의 식기세척기라고 보면 되시겠다.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의 8시간 중 대략 6시간을 설거지통 앞에서 시간을 흘려보낸다.나머지 2시간은 식사 주문이 들어오면 샐러드 따위를 만들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나 김지윤이 호주에 와서 느낀 감정이라곤 오롯이 '자괴감' 뿐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3개월간 주방 가장 어둡고 낮은 자리에서 컵 한번 깨지 않고 쌔빠지게 그릇을 닦던 나는 그 어느 날 사장님께 통보했다.
그만둘래요. 저 집에서도 설거지 잘 안 하거든요?
사장님은 날 잡았다. 내가 없으면 가게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반짝이며 웃는 언니 오빠와 스테파니를,작은 구멍으로 바라보며 설거지만 해대던 주방 보조의 빠릿빠릿하고 야무진 손놀림이 가게 지분을 꽤나 먹어치우고 있던 모양이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나는 적당히 욕심 낼 줄 알았다. 내가 검지를 들어 가리킨 자리는, 그렇게 원하고 갈망하던 바리스타도 캐셔도 아닌 바로 그들 옆홀 안쪽에 자리한 샌드위치 메이커. 그곳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가리키던 하얀 검지를 바로 세워들며 사장님을 다시 쳐다보았다.
저 그리고요, 시급 1불 올려주세요.
Stephanie
스테파니. 오 스테파니. 스테파니로 말할 것 같으면, 시드니 최고의 명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수재,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 당당히 1등을 거머쥔 동양 여자아이, 암벽 등반의 제일 힘든 코스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뿐히 올라가는 건강 체질.
그녀는 만 12세에 호주라는 나라로 유학을 왔다. 처음 시드니에 온 날 우유를 사러 나온스테파니는 길을 잃었단다. 지금처럼 휴대 전화도 구글 맵도 발달되지도 않았던 시절, 간판과 표지판에만 의지해 슈퍼를 찾아 나선 그녀는 집을 떠나온 지 단 몇 분 만에 깨달았다. 본인은 영어를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일방통행 표지판 앞에서 엉엉 울던 스테파니는, 그녀의 전두엽을 들들 볶아 어찌어찌 집에 찾아갔다고 했다.
스테파니는 호주를 사랑했다. 그녀는 집도 잘 살았고, 영어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고 운동마저 잘했다. 호주 거주의 네 박자를 고루 겸비한 스테파니에게 단 한 가지 없었던 것은 영주권. 그녀는 골치 아픈 얼굴로 나에게 이야기했다. 언니, 건축학과를 졸업해서는 영주권을 딸 방법이 없어.
그래서 그녀는 열심히 다니던, 거대하고 웅장하고 번쩍이던, 내가 언제나 동경해왔던, 그 명문대를 자퇴했다.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나는 당사자보다 가슴 아파했다. (물론 스테파니 본인이 더 속상했으리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리고서 그녀는 영주권이 최고로 잘 나온다 하는 요리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디쯤에서 만나게 된 남자 하나로 인해, 대학교를 때려친것도 감내한 부모님과의 인연을 달리 할 줄이야.
앞에서 말했다시피 스테파니의 집안은 꽤나 빵빵했기에 그녀의 어머니는남자를 극렬히 반대했더랬다. 대학교를 마음대로 때려치운 것도 모자라 신학을 공부하는, 그녀에게 필요한 영주권조차 없는 남자라니? 스테파니는 카드도 빼앗겼고 부모님의 지원 역시 끊어졌다며 한탄을 했다. 정말 몸 하나 덜렁 남은 그녀는 학교를 옮기며 멜버른으로 떠났다. 본인은 잘 도착했고, 앞으로 잘 지낼 거라 했다. '부모님은 결국 네 편을 들어주게 될 거야'라는 상투적인 위로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에게서는 종종 전화가 왔다. 사는 게 녹록지 않다고 투정했지만 그 어떤 날들의 스테파니보다 명랑한 목소리 었다. 몇 번의 전화를 끝으로 우리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역시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지. 고로 스테파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간간히 뜨는 프로필 사진을 보며 역시나 넌 참 잘 지내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