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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kim Mar 03. 2020

세 번째 산맥

4. 가지 가지 이야기들


투박한 나무판


샌드위치 메이커의 하루 일과는 이랬다. 아침 여섯 시 오십 분 카페 도착 - 머리를 쪼매고 앞치마를 두른다 - 커피 일 잔을 마셔준다 - 배달 온 빵을 종류별로 정리한다 - 샌드위치 만들기 시작 - 점심시간에는 빵을 구워 음식을 뺀다 -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남은 샌드위치를 정리한 후 싹싹 닦고 퇴근! 아주 간단명료한 하루들이다.


샌드위치를 싸기 시작하면 머릿속이 아주 고요해진다. 그저 기계처럼 빵 뚜껑을 열고, 재료를 쌓아 올리고, 소스를 뿌리고 뚜껑을 닫고. 12시 전까지 무한 반복을 한다. 사실 따져보자면 주방 구석에서 하던 설거지와 다를 바 없는 단순노동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의미 없는 보람을 느꼈고 내가 만든 아이들이 바닥을 보일 때는 정말이지 뿌듯함마저 들었다.



어쩌면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든 샌드위치는 기깔나게 맛있었으니까. 샌드위치란, 참 희한한 음식이란 생각이 든다. 동일한 빵에, 같은 재료를 정량 집어넣는데 이 놈이 쌀 때는 맛있고 저 놈이 쌀 때는 맛이 없다. 마치 내 인생과 같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똑같은 경험과 똑같은 기억임에도, 그 당시엔 지독히도 맛없었던 기억들을 지금에 와서 찬찬히 씹어 음미하고 있자니 참 재미있고 우습다.


앞으로도 나는 힘겨운 순간들을 그렇게 버텨야지 하고 다짐 해 본다. 어쨌든 결국 난 웃으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하면서 말이다. 몇 번이나 넘어졌던 내 모습을 기억하면서도 그다지 속상하지만은 않은, 지금처럼 말이다.




최악의 인간


내가 만난 최악의 인간이 누군지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James, 카페의 메인 바리스타를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쯤으로 꼽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눈빛이 완전히 맛탱이가 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카페에 오는 여자 손님들의 몸매 품평은 물론이거니와, 아르바이트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보며 비웃기도 했고, 때로는 인격 모독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으로 놀러 간 외국친구 이야기를 하니 걔 지금 쯤 K-노래방에서 여자 끼고 노느라 아주 신났있겠구만 이라는 말을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내뱉는 사람, 어깨가 결려 마사지받고 싶다는 말엔 난 건마 (건전 마사지의 줄임말) 싫은데? 라며 낄낄대는 인성의 소유자.


그는 끼고 다니는 톰포드 안경에 어줍지 않은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물질주의의 산물이었고 지나가는 모든 여자의 외모 품평을 하면서도 본인의 키가 170조차 되지 않음을 인지하지 못했던, 몹시나 황당한 사내이다. 그런 그에게도 오래토록 만나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 짝꿍이 있었으니, 나는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녀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그가 최악의 남성 두 번째라면 첫 번째에, 혹은 첫 번째라면 두 번째에 자리하고 있을 사람은 바로바로(두구두구) 내 첫 남자 친구인 박 모 씨다. 박 모 씨는 87년생으로 호리호리한 몸매만큼 의지력도 호리호리 했다. 스물한 살 처음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된 나에게 그는 꽤나 다정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500일 언저리에 헤어짐을 고했다. 이유는 백수가 된 그가 한심해서가 아닌, 데이트 때마다 100프로의 돈을 쏟아붓는 이십 이세의 나 자신이 한심 해서였다. 뭐해?라고 물으면 게임해.라고 되돌아오는 대답이 아침 저녁 관계없이 삼 개월을 넘어가자, 정말이지 모든 게 싫었다.


그 어느 날 통화를 마치며 작별을 이야기하자 그는 순순히 응하는 척하고서는 일주일 후 집 앞 놀이터로 찾아왔다. 그의 손엔 체 모를 검은 봉투가 들려 있었고 그의 옆엔.. 그 옆엔, 본인의 몸보다 적어도 세 배는 큰 곰인형이 앉아 있었다.

호러 그 자체였다.


왜 왔어?

헤어지기 싫어서

... 근데 그 곰은 뭐야?

네가 예전부터 큰 곰인형 갖고 싶어 했잖아

(그러니까 그걸 지금 왜) 아... 손에 든 건 뭔데?

하루 종일 기다리느라 배고파서 삼각김밥 사 먹었어 (울먹울먹)


그는 울었고 나는 그나마 남아있던 안쓰러움마저 탈탈 털렸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곰인형은 가지고 가라는 그의 말에 그 커다란 덩어리를 짊어지고서 아파트 계단을 낑낑대며 올랐다. 곰은 향후 3년간 미스터 킴의 베개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 새끼 미쳤구나 라고 욕하면서도 곰인형의 배가 납작해질 때까지 베고 누워 티비 시청을 하는 사랑스러운 나의 아빠.


별도 안 뜬 캄캄한 새벽. 전 여자 친구의 집 앞에서 두려움으로 점 칠 된 그녀를 기다리며 서른 몇 통의 전화를 하는 일이 더 이상 박 모 씨의 앞날에 없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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