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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Apr 19. 2017

자괴감 Feat. 자존감

평온을 허락하지 않는 위험한 녀석. OTL



작사 : Shin Gun


나는 보통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다. 나름 다양하고 경쟁력 있는 재능과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흥미가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잘할 수 있으며 이제까지 많은 곳에서 그렇게 증명해 왔다고 생각한다. 난 분명히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고 확고한 나만의 철학이 있으며 그것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한치의 의심도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단숨에 무너트리는 것이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자괴감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전 대통령의 연설문 덕분에 자괴감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우스워진 느낌이 있지만 오만한 모드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도 자괴감의 무시무시함을 더욱 부각하고 싶어서였다. 


여하튼 나는 이제까지 좋아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일을 즐긴다. 하지만 안정을 찾으면 동시에 다양한 호기심이 유발하는 병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불확실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것 또한 즐긴다. 도전하는 것은 즐기지만 그렇다고 그 과정을 모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그리하여 어떠한 새로운 목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일시정지 혹은 잠시 멈춤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는 편이다. 하지만 매우 행복하고 여유롭게 즐겨야 하는 이 소중한 시기를 방해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언제나 자괴감이다.


내가 잠시만 방심하면 깊은 곳으로 침투해 무기력함, 불안감 그리고 더 나아가면 우울함이라는 친구들을 불러들인다. 난 괜찮은데 실제로 그럴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네거티브 해진다. 심할 때는 마치 원피스의 우솝처럼 페로나의 능력이 전혀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정도로 심해진다.


이것이 너무 심해져 자존감마저 바닥을 보이게 되면 헤어 나오기 힘들어진다. 도대체 자괴감이 뭣이길래 굳이 이렇게 나를 괴롭혀 주는 걸까.




자괴감의 정체

자괴감 (自愧感) 
[명사]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전을 찾아 보고서야 정확한 의미를 알았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니. 그것은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니 굳이 가질 필요 없는 마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한쪽 발이 잠기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이 빨려 들어간다.


이왕 찾아보는 김에 피처링을 담당하는 자존감에 대해서도 신상을 털어보자.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자아존중감을 간단히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사전에 없는 것 같고 '자존'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존(自尊)
[명사] 
1.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킴.
2. 자기를 높여 잘난 체함.


찾다 보니 같은 '자'크루에 자부심이라는 녀석도 있다. 


자부심 (自負心)
[명사]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 

아이러니하게도 자괴감은 자존감을 불러오며 자부심을 어디론가 숨어버리게 만든다. 알면서 당한다는 말이 있듯이 오승환의 돌직구나 커쇼의 커브처럼 예상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당해낼 도리가 마땅히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자괴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나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게, 또한 자부심이 숨어버리지 않게 열심히 흥미로은 일을 하며 매일매일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레스토랑에 가거나 비싼 옷을 사거나 좋은 차를 타거나 멋진 몸을 가꾸거나 하는 등 각자마다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 있을 텐데 하필이면 나는 그 방법이 일이라니 이 얼마나 저주받은 것인가.  그러기에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평온함을 누릴 새도 없이 자괴감이라는 늪에 빠지기 십상인 것이다. 




자괴감 극복법

계속 흥미로운 일을 하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않는 이상 내가 알고 있는 뚜렷한 극복법은 없다. 그냥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괴로워해 주는 것이 전부이다. 어쩌면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일시적인 마취주사 같은 것으로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금세 통증이 느껴진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무 기대다 보면 이따금씩 부작용도 생긴다. 최근에는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낯선 외국 생활의 쓸쓸함을 달래줄 위로를 구하고자 연락해 투정을 부려봤으나 그 정도도 각오 안 하고 갔냐는 팩트폭력을 당한 후 평소보다 수십 배 이상의 서운함을 느낀 나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친구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내가 선택을 했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부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이제까지의 내 자괴감 극복법은 어설프게 외면하는 척하지 않고 스스로 충분히 최대한 받아들이고 인정하여 하루빨리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무기력함을 온몸과 마음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과거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끝도 없이 추락하던 힘든 시기가 있었을 때 벗어나기까지 1년이 넘게 무기력함의 끝을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 시기에 집 앞으로 찾아와 나를 슈퍼마켓에 끌고 가 이것저것 있는 대로 쓸어담으며 조용히 냉장고를 채워주고 간 형이 있었고 또 다른 어떤 유부남 형은 소주 한잔 사주고 가면서 와이프 몰래 숨겨두었던 용돈을 꼬깃꼬깃 내 주머니에 강제로 넣으려 한 적도 있었으며 전에 다니던 직장 상사님들은 술자리로 불러내 내 꼴을 보시곤 더 이상 못 봐주겠다며 회사로 다시 돌아오라고 명령을 하신 적도 있었고 운동이라도 하자며 친구들이 모인 사회인 야구팀으로 강제로 소환한 친구도 있었고 게임에 접속하면 언제나 함께해 주는 지인들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러한 고마운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절벽 끝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티기라도 했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자존감 수치

1부터 100까지 있을 때 기분상태가 최악일 때 1이라 치고 최상일 때 100이라고 치면 사람들이 평균 상태가 50이라고 치자. 좋은 일이 있으면 흥분해 70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나쁜 일이 있으면 우울해 30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 짧은 순간에 100과 1을 큰 폭으로 오가는 사람이 있다면 조울증(양극성 기분 장애)이라 부르고 이럴 경우 주변 사람들이 힘들 가능성이 높다. 언제나 평균 70 이상의 수치를 보이는 조증이라고 하기도 하고 평균 30 이하의 수치를 보이는 사람을 우울증이라 하기도 한다. 


모든 감정은 너무 많아도 문제이고, 너무 없어도 문제입니다. 즐거움도 마찬가진데, 비정상적으로 너무 많이 느끼는 기쁨은 조증(mania)이 됩니다. 조증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들떠 병적일 정도로 행복감에 심취해 있는 상태를 말하며, 조증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조증은 우울증이 같이 반복되는 조울병의 일종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증 [躁症] - 100%의 행복감 (인간의 모든 감정, 2011. 4. 10., 서해문집)


가끔 상당히 기쁠수라도 있으니 조증이 있는 사람들을 무척 부러워했는데 언젠가는 결국 우울증에 빠진다니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며칠 전 우연히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를 봤는데 베스트셀러 순위 1위 책 제목이 '자존감 수업'이었다. 뭔가 위로가 될까 하고 책을 주문할까 하다가 지금 미국에 있다는 걸 망각한 것을 깨닫고 빠르게 포기했지만 그만큼 자존감에 대한 책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어디엔가 많은 동지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자존감 수치가 소폭으로 상승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웃음을 잃었다. 같이 살던 지인들도 내가 웃는 모습을 발견하면 낯설어할 정도로 잘 웃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가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혹시 기분 안 좋은 일 있냐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미리 나 지금 기분 좋은 상태라고 얘기를 해도 의심의 눈초리는 사그러 들지 않는다. 내 평균 상태가 50이라면 외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 3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신경이 너무 아파서 못견디고 치과에 가서 신경치료를 한것처럼 언젠가 감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죽여 놓은것 같다. 그러므로 기쁜일에도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것을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아직 치료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리메이크

내가 감정을 죽인건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감옥 안에 갇힌 죄수 같은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이었던 시스템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일부 선임들을 만났던 군생활 덕분일 수도 있고 사업을 하면서 피폐하게 살던 시절 때문일 수도 있고 굳게 믿었던 믿음이 깨졌을 때의 트라우마 일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음악을 하며 번 돈보다 쓴 돈이 많을 때 정말 쓴 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회에서 정책 일을 하며 불합리했던 구조에 치이고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아마도 단계적으로 부분적으로 조금씩 쌓여온 것이 아닌가 싶다. 상식을 원했고 이상을 바랐지만 평생 살아온 곳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홀가분하게 떠나 먼 곳에서 치유되기를 바랐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이미 굳어진 건 아닐지 잘 모르겠다. 


어찌 됐던 행복하면 자동으로 치유되는 문제일 것인데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인생이라는 곡을 이제 와서 버리고 새로 쓸 수는 없으니 적어도 다른 장르로 리메이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동시에 나를 훌륭하게 편곡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게 되길 바라본다. 그리고 기쁜일이 있으면 마음껏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자괴감과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고 평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언젠가 자괴감에 위로가 될 수 있는 곡을 작업해서 발매해야겠다. 다만 3년이 넘도록 작업을 안 하고 있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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