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은 계산서 집지 않아
[편집자 주] 기후변화와 관련한 미국 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의 FT 기고문을 소개한다. 기후 재앙을 피하기 위한 당위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안을 담고 있따. 오는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COP26)에서 연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2017년 소설 <뉴욕 2014>에서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룬 데 이어, 2020년 기후위기가 심각해진 가까운 미래를 그린 <미래부The Ministrey for the Future>를 출간해 평단과 언론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따. 살아 있는 최고의 SF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과학적 사실을 중시하고, 작품 속에서 생태학적 주제와 정치를 많이 다룬다. 곧잘 자본주의의 대안을 탐색하곤 한다. 선배 대가인 필립 K. 딕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부인이 환경학자이다.
역사적 변화의 벼랑 끝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지금이 그런 것 같다. 물론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어쩌면 심지어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고까지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SF 작가는 다른 사람보다 미래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은 더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팬데믹 사이에 극단적인 기후 사건들이 점점 잦아진 것이나, 과학자 공동체에서 보고하는 데이터와 분석들을 보면 상황은 쉽게 알 수 있다. 몇 주 전 아내와 나는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차를 몰고 간 적이 있다. 와이오밍에서 먹구름 같은 산불 연기와 마주쳤다. 너무나 짙어서 도로 양쪽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산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1천 마일 동안 이어졌다. 그 후 우리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 위원회의 최신 보고서가 발표된 것을 보게 되었다. 기후 문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아주 상세히 기록한 문서였다.
인류는 지금 단순히 변화가 아니라 재난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우리는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마치 지평선의 검은 폭풍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로 인한 재난을 피하고 우리의 유일한 고향인 지구와 건강한 관계를 만들려면 우리의 습관과 법, 제도, 기술에 엄청난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우리 눈으로 볼 있는 것들이다.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재앙으로 무차별 난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2020년대는 그 사람들이 겪었을 놀라움으로 가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변화가 닥치는 속도와 강도는 제외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두려운 예감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지금 우리 시대는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년과 더 닮았다. 당시 모든 사람은 미끄러운 경사로에서 절벽 아래를 향해 속수무책으로 내려간다는 느낌으로 살았다.
하지만 역사적 비유를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도 우리 자신의 존재 수단 자체를 망가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지금의 순간이 전례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인류세라는 말을 만들었다. 우리의 수는 너무나 많고, 우리 기술은 너무나 강력한 데다 우리의 사회 시스템은 결과에는 너무나 부주의해, 지구 생태계에 우리 자신이 끼친 손상은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기간을 거대 가속Great Acceleration이라 부른다. 우리가 시작한 변화의 해로운 측면들은 생물학적으로 지질학적으로 엄청난 추진력을 갖고 있다.
그저 외교관들을 불러 모아 지금까지의 것들을 다 취소하고, 생태계와의 평화를 선언하고 말 수는 없다. 실제로 2015년에 우리는 그렇게 했다. 이른바 파리 협약이다. 하지만 그것은 변화의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합의였을 뿐이다. 그것을 실현하려면 이제 우리는 그것에 맞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사실상 우리 문명 전반에 걸쳐-에너지 발전, 교통, 건설 등 모든 것의- 탈탄소화에 합의했다. 이 모든 활동들이 대체로 화석 연료를 태워서 가동되어 왔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엄청난 도전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우리가 양차 대전에서 싸울 때 동원되었던 것과 맞먹는 것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가 그 정도의 강도 높은 노력을 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아직도 모두가 확신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숱한 이해관계들이 걸려 있다. 사적인 개인이나 기업뿐 아니라 지구 상의 가장 강력한 국가들 다수가 계속해서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에 깊이 가담한 상태다. 따라서 파리 협약은 국제연맹 같은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구상은 좋았지만 실패한 것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우리가 그렇게 실패한다면 그 결과는 20세기의 대전들보다 훨씬 더 나쁠 수 있다.
또다시 이 말이 과장되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받아 든 사실들을 보면 과장이 아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지금 끔찍한 곤경에 처해 있다. 그런데도 그렇다는 것을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다. 앞으로도 결코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뭄과 화재와 폭풍과 홍수가 더 빠르게 닥치더라도 그럴 것이다. 역사에서는 매 순간 그때의 '느낌의 구조'가 있다. 문화 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한 말인데, 이것은 새로운 것들이 일어나면 변한다.
나는 수십 년 후 미래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쓸 때마다, 그런 느낌의 변화를 상상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대단히 어렵다. 현재의 구조가 그런 종류의 상상들까지 틀 지우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많은 것들은 아주 단단하고 깊게 뿌리박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대단히 취약하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지만 변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뿐인 행성 위의 일개 종에 불과한데도 일반적인 합의나 지구적 연대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실행에 옮기는 정치적 다수다. 그것은 우리 일상 속에서 우리 자신과 다음 세대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실천하는 노력을 통해 매일 재편될 수 있다. 이 일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힘든 도전이다. 좌절하기 쉽다. 그럼에도 최근 몇 가지 일들은 내게 희망의 이유가 되어 준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가 단일 문명 속에 있는 단일 행성 위에 살고 있으며, 이것은 치명적인 방식으로 교란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어디서나 사람들이 똑같은 질병으로 죽는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충격적인 현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같았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의존하는 공급 체인이 우리의 사재기에 의해, 즉 우리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는 그것이 화장실용 휴지와 위생 용품이었다. 하지만 만일에 그것이 음식이었다면. 공황, 시스템 붕괴, 기근, 만인 대 만인의 전쟁. 이것은 우리의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이 하나의 행성 위에 묶여 있는 수인의 딜레마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목숨을 읽거나 아니면 각자 뿔뿔이 그렇게 된다. 이른바 프랭클린의 법칙이다.
팬데믹의 또 다른 교훈은, 우리가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 것인데, 과학은 강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과학을 지금보다는 더 잘 사용되도록 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많은 좋은 것들이 따라올 것이다. 과학을 조준하는 것은 인문학과 예술, 정치, 법의 일이다. 지금 어떤 과제가 우리가 착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문명 차원에서 결정해야 한다.
2020년에 우리가 배운 세 번째 교훈은 의학적인 사실이다. 인간은 열과 습기가 극도로 높은 비율로 결합된 상태에 장기간 노출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어느 정도는 알려졌지만, 실존적 문제로까지는 인정되지 않은 이런 깨달음은 우리가 초래한 기후가 어떻든 인간은 그저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평가들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적응하면 된다!" 확신에 찬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면 지구 평균 기온이 3-4도 상승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적응하면 될까? 인간은 어떤 것에도 적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은 기온과 습도의 측정치인 습구온도 35도가 넘어가는 조건에서는 살 수가 없다. 우리는 그런 조건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과열로 인해 고체온으로 사망한다.
올 7월에 파키스탄과 아랍에미리트가 습구온도 35도 수준까지 잠깐 도달한 적이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화석 연료를 태우면 지구 평균 기온은 계속 상승할 것이고 열과 습기의 이런 치명적인 결합은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비단 30억 명 이상이 살고 있는 열대 지역뿐만이 아니다. 올여름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고온 기록이 라스 베이거스를 추월했다. 조속히 온실가스를 감축해 기후 변화를 완화해야 하는 것은 그저 좋은 생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가 되고 있다.
파리 협약은 이런 막대한 노력을 조직화해내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우리에겐 그런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봉착한 문제는 지구적인 것인데, 여전히 우리는 민족국가 체계에서 살고 있고, 각국 대표들은 자국 이익을 지키는 임무가 주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국 이익과 세계 이익 간의 불일치가 보일 때 어떤 사람들은 자국을 택할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수인의 딜레마와 같은 숱한 문제를 낳는다. 미덕을 베풀어야 할 상황에서 누가 먼저 행할 것인가?
먼저 행동하는 나라들은 자신들의 미래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내다보기에는 너무 소심하다. 그래서 결국 대단히 힘든 선택에 처하게 된다. 가령, 우리는 정말 위험한 지경이 되는 지구 기온 평균 2도 상승을 넘기 전까지 탄소를 추가로 태울 수 있는 양은 900기가톤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세계 전역에 걸쳐 화석 연료 수천 기가톤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다. 대부분은 개별 국가들이 소유하고 있는데, 생태계 재앙을 피하려 한다면 땅 속에 그대로 둬야만 한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이 매장분을 자국 자산의 일부로 여긴다. 이것이 이미 담보물이자 안정적인 수입원이며, 꽤 많은 나라들로서는 국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국가들이 파리 협정에 서명하고 신속한 온실가스 방출 감축 원칙에 이론적으로는 동의했음에도, 사우디아라비아나 러시아, 캐나다, 브라질, 나이지리아, 호주, 멕시코, 중국, 베네수엘라, 노르웨이, 미국 등의 나라-여러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파리 협약에 따라 수십 조 달러의 수입 손실을 입게 되어 있다.
자연히, 이런 나라들 정부 선출직이나 직업 공무원들은 곧 묶이게 될 자산의 마지막 가치를 태우려고 최선을 다하려 들 것이다. 그들은 그런 행동을 애국적으로 여기고, 수탁자로서 의무로 볼 것이다. 따라서 다른 조정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재고 처리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아주 커다란 측면이 재정에 관한 것이라는 뜻이다.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돈의 흐름을 조정하는 것이 이번 위기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가는 데 열쇠가 될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우리 자신이 탈탄소화는 물론 지속 가능한 문명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다른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하는 법을 알아내야만 한다.
석유 국가들이 파산에 이르면서 필사적인 일을 벌이는 것을 막도록 하는 것이 이번에 새로운 조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물론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할인과 상각, 비난과 독선, 탕감 같은 것들이 작동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시장이 저절로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테니까. 시장에 의한 지배라는 개념은 '단일원인애호증monocausotaxophilia'의 재앙적 사례인데, 이 말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한 가지 원인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독일 심리학자 에른스트 팝펠이 우리들 사이에 너무나 팽배한 경향을 풍자한 신조어다. 우리 사고의 이런 약점, 즉 믿을 만한 알고리즘이나 군주를 기대하는 부질없는 희망은 언제라도 저항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특히 지구 경제를 구축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금융을 시장에 맡겨두면 모든 것이 잘 조절될 것이라는 것은 지난 40년의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진실이 아니다.
시장의 가격 책정 방식은 체계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미래를 부적절하게 평가절하한다든가, 외부효과를 제외한다든가, 그 외 허다한 약탈적인 잘못된 계산 방식을 적용한다. 그 결과 막대한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를 낳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그것이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고 지상의 법칙이다. 최고 수익률의 자본 투자야말로 시장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태계를 구하는 것은 최고 수익률의 투자가 아니다. ( 이 또한 시장의 또 하나의 잘못된 계산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왜냐하면 그 구조 사업에는 지금 우리의 인프라 대부분을 대체하고, 우리가 지금껏 대기 중에 버려 온 폐기물을 수거해 처리하는, 사실상 지구 차원의 하수 체계가 될 것을 건설하는 일이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아무도 고수익 투자라고는 생각할 리는 없다. 실제로 아무도 수조 톤의 드라이아이스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에서 그만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끌어내는 것은 단지 비용일 뿐이다-생존에 필요한 비용이지만, 최고 수익률의 투자는 아니다. 따라서 사적 자본은 그런 일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판단을 그냥 유지되도록 놔둔다면 우리는 익어서 죽게 된다.
하지만 금융 또한 기술이다. 다시 말해 문명의 소프트웨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소프트웨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을 평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역시 인간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변경과 개선을 통해 자유롭게 개선할 수 있다. 바로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다행히도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이런 필요를 느끼고 혁신책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의 참여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암호화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이 새로운 암호화폐의 어떤 것들, 가령 비트코인 같은 것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암호화폐는 아무것도 돈이 아니다. 새로운 튤립이거나 또 다른 투자 거품 상품이다. 돈은 교환의 매개이고 가치의 저장소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사회적 신뢰의 표시다. 민족국가 체계에서 우리가 신뢰하는 돈은 국가에 의해 보장된 것이다. 나라가 부유할수록 우리는 그 나라의 돈을 신뢰한다. 따라서 지금의 기후 변화가 대표하는 실존적 위기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것은 법정통화(발행한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조만간 우리는 우리의 중앙은행들이 돈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유지한 채 매년 얼마나 많은 화폐를 찍어낼 수 있을지를 시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험이자 임시변통일 것이다. 2008-2011년과 2020-2021년의 양적완화는 꽤나 많은 신권을 매년 부정적 결과 없이도 찍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런 발견에 추가할 만한 새로운 묘안은 새로 찍어낸 돈을 탈탄소화와 다른 생태친화적 활동에 우선 지출한다는 구상이다. 이것은 탄소 양적완화라 불리고 있는데, 현재 많은 중앙은행들이 이것을 연구 중이다.
세계 최대 중앙은행 89곳이 만든 조직인 '금융시스템 녹색화 네트워크'가 최근 이런 금융 혁신을 위한 가능한 방법론을 그린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들은 국가와 기업, 개인 들이 대기에서 탄소를 추출하면 그 비용을 직접 보상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어쩌면 석유 국가들도 화석 연료를 지하에 그대로 유지하면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석유 회사들도 공기 중에서 탄소를 빨아들여 땅 속으로 다시 파묻을 경우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빙하가 녹은 물이 바다로 방류되고 있는 남극과 그린란드에서 거대 빙하 아래 물을 퍼올리는 것에 대한 보상도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입법부와 시민들이 나서서 자국 중앙은행들이 이런 것들을 실행에 옮기도록 압박하고, 궁극에는 지도하거나 요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희소식은 이런 새로운 전략을 동원하면, 지금의 정치경제 하에서도, 이상하긴 해도 당면 과제 해결에 최대한 맞추면,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하고, 다가오는 대량 멸종 사건을 피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할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나 자신이 단일원인애호증에 빠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앞으로 문제를 헤쳐나가려면 탄소 양적완화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다양한 '30X30' 계획(미국 토지와 해수의 30%를 야생지로 보호하는 계획)에서 열거한 것처럼, 우리는 생물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야생지를 재확립해야 하고, 미생물로 음식을 배양함으로써 땅의 부담을 더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고, 도시를 녹화해야 하고, 인프라의 상당 부분을 대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는 엄청난 일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비용이 지불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하기에 탄소 양적완화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규제와 세제를 결합해 민간 자본을 보다 유용한, 생존-중심의 사업으로 연결시킨다면 우리는 곤경을 헤쳐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완전 고용이 아주 많이 함축되어 있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필요한 모든 일들을 국가 간 기후 평등의 방향으로, 빈부국 간 심각한 불평등을 완화하는 쪽으로 지렛대를 행사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 일련의 새로운 정책들은 공공과 민간 간의 케인즈식 균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거대한 전환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공포감이 커진다. 뭐라고? 새로운 정치경제? 그런 종류의 변화는 과거 1980년이나 1945년, 혹은 18세기 민주 혁명 때 일어나지 않았나? 지금은 확실히 불가능한 것 아닌가? 자본주의의 끝보다 차라리 세계의 끝을 상상하기가 더 쉬운 것 아닌가?
아니다. 공공선을 위해 우리의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어느 시대나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금 대멸종 사건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감안하면 이 깨달음은 특히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결코 계산서를 집지 않는다(비용은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