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일진이 사나운 날이 있다. 출근하려고 집 밖을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물이 마시고 싶어졌다. 급하게 냉장고로 달려가 물 한 모금 마시는데 사레가 들러 아침부터 눈물 콧물 싹 뺏다. 차가운 물이 옷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기분 나쁜 느낌을 느낄 새도 없이 옷을 갈아 입고 그대로 정류장으로 향했다. 신호등은 조급한 내 마음을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타야 할 트램이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초록색 불로 바뀔 생각이 없다.
뒤늦게 신호가 바뀌었지만 달리면 트램을 탈 수 있을 것 같아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바로 눈앞에서 허무하게 떠나버렸다. 다음 트램은 15분 뒤에 도착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화를 삭이며 정류장에서 다음 트램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미 출근 시간을 훌쩍 넘긴 탓에 눈치를 보며 출근한 순간 오전에 예약한 클라이언트가 노쇼를 하면서 늦게 출근해도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멍하니 한 시간 동안 주변을 청소하며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짜증과 후회가 뒤늦게 몰려왔다. 이런 날은 아무리 조심해도 일이 생기니 부디 큰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날은 불 규칙 적이지만 주기적으로 일어난다. 아침에 지인과 브런치 약속이 있었는데 알람이 울렸는지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었다. 다행히 마지노선 알람 소리를 듣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전날 뭘 입을지 미리 옷을 골라 두어서 준비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은 물컵에 마시고 대중교통 어플을 통해 정류장에 트램이 몇 분에 도착하는지 확인까지 하고 난 후 나가려는데 발코니에 이질적인 검은색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별생각 없이 발코니 문에 손을 대는 순간 검은색 물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놀란 것일까? 아님 나를 보고 놀란 걸까? 갑자기 이리저리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서로 탐색전이 끝나고 눈이 마주친 순간 내 눈앞에 있는 게 박쥐라는 걸 뒤늦게 인지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약속시간에 늦는다는 점, 이 시국에 박쥐를 만났다는 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점 등 모든 걸 비춰 봤을 때 오늘이 바로 일진이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우선 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속 시간을 뒤로 늦췄다.
'세상에 박쥐야 네가 왜 우리 집에 있니.'
시국이 시국인지라 불안한 마음에 빨리 날아가길 바라며 발코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호주 친구가 야생 동물 박쥐 구조 협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협회가 존재하는 것 같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협회에 전화했더니 구조대가 도착하려면 5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놈의 박쥐 때문에 황금 같은 휴무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 할 것 같아 짜증이 몰려왔다. 무슨 생각으로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박쥐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자 이 친구 곧 죽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차피 박쥐가 죽나 약속시간에 늦어 내가 죽나 둘 중에 한 명 죽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자 협회에서 주변에 박쥐를 구조할 수 있는 대기 인원이 있는지 확인하고 연락을 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중간중간 박쥐에게 주면 좋을 것 같은 과일들을 전해 들었는데 마침 다이어트하려고 전날 수박을 사두었는데 박쥐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이랜다. 난 이거 먹고 하루를 버티려는데 네가 내 남은 콩 한쪽을 가져가야 한다니 기분은 좋지 않지만 빨리 날아가길 바라며 조각조각 썰어서 발코니에 던져주었다.
그리고 한 십여분 기다렸을까? Emma라는 사람한테 연락이 왔다. 문자 메시지를 봐도 딱 구조 협회 사람이었다. 정말 밝은 사람인데 박쥐를 아무렇지 않게 휙 잡아서 애기 다루듯 이야기하는데 박쥐가 재채기를 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엠마가 확인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 박쥐는 엄마 박쥐야 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전날 비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 중 우연히 발코니로 떨어졌는데 주변이 다 유리나 쇠로 되어있다 보니 물건을 집고 올라갈 만한 게 없어서 비행을 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한다.
젖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새끼 박쥐들이 어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데 엠마는 갑자기 전화해주어서 너무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박쥐들이 자주 가는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서 박쥐를 풀어줄 예정이라며 엠마는 부리나케 떠났다. 오전부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정신이 혼미했다. 오늘은 부디 이것보다 더 큰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세상 사람들 다 이렇게 황당한 일 생기면서 사는 건지 아님 나한테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건지 의문이지만 제발 다시는 일대일로 박쥐와 대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