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책을 백날 봐도 실제로 요리를 해보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는 것처럼 영여도 마찬가지다. 책을 보고 열심히 공부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Hi, I'm fine Thank you and you? 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나마 호주에 있어서 살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사용해야 하니 자연스레 프리 토킹 실력은 늘어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트에서 무인 결제기가 작동하지 않아 직원이 올 때까지 멀뚱멀뚱 기다리기만 했다면 이제는 자연스레 Excuse me를 외쳤다.
호주에 온 지 2년이 넘어갈 때쯤 유창하진 않아도 외국인 친구들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다 보니 나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간다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영어를 술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셰어 하우스에서 벗어나 집을 렌트하고 나서부터 영어에 대한 갈증이 다시 시작됐다. 집에 문제가 생겨 빌딩 매니저, 부동산 매니저와 연락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빌딩 매니저는 호주 사람인데 억양이 너무 쌔서 전화로 이야기하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월세 살이 할 때는 부동산, 집주인과 연락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호주는 왜 이렇게 사사건건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큰 건이 생겼다. 건물 외벽 수리를 하는데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집만 돌출형 발코니라서 이곳에 리프트를 설치해야 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쌓여가는 먼지와 콘크리트 자재들. 보면 볼수록 답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빌딩 매니저에게 이야기해도 이미 공사에 대한 내용을 커뮤니티 게시판에 부착해서 보지 못한 내 잘못이라는 말 뿐이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이라고 해도 꼭꼭 숨겨져 있으면서 그걸 커뮤니티 게시판이라고 한다니.. 일정에는 약 6주간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공사가 끝난 오후에 문을 열어도 바람을 따라 방안으로 돌가루들이 들어왔다. 덕분에 하루에 두세 번씩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6주가 지나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부동산에 연락해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하니 건물 매니저는 자기도 언제까지 할지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건물 게시판 보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 할 땐 언제고 정해진 기간 이상 벗어나자 본인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너무 억울했다. 이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서 메일을 보내려고 했지만 빈 스크린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 애 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돈 Upset, disappoint 짧은 단어들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호주에 거주 한 기간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공부를 멀리 했더니 바로 채찍이 들어왔다.
한술 더 떠서 빌딩 매니저가 발코니 콘크리트 자재를 알아서 처리하라는 문자를 받고 나서 눈이 뒤집혔다. 처음으로 빌딩 매니저에게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시작했다. 빌딩 매니저도 적지 않아 당황했나 보다. 본인도 스케줄에 대해서 유감이고 청소하려고 집에 방문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아 청소를 하지 못했다고 변명하기 시작했다.
쌓여있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답답한 마음은 조금 진정이 됐다. 허탈함, 공허함, 좌절감, 피로감 등 다양한 감정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언어 공부는 평생 해도 부족하다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영어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을까? 이 사건 이후로 영어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꺠닫고 영어 수업을 하는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엘츠, 토익, 토플, 프리토킹 등 다양한 수업이 있었지만 내가 가장 관심 있던 건 라이팅 수업이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학교에 전화해서 수업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에 드는 학교를 발견했다. 간단한 서류 절차를 밟고 나서 영어 레벨테스트를 진행했다.
얼굴을 직접 보고 진행되어야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줌으로 영어 테스트를 보았다. 약속된 시간에 접속 하자 선생님이 먹잇감을 발견한 호랑이처럼 영어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영어를 시작하게 된 이유, 호주에 오게 된 이유, 어떤 공부를 했는지, 어떤 분야에 관심 있는지 등 쉴 틈 없이 질문을 했다. 헐벗은 느낌이었지만 최대한 아는 단어를 이용해 설명했고 선생님도 내 이야기에 경청해주었다. 약 2시간 동안 줌을 통해 스피킹, 라이팅, 리스닝, 리딩을 테스트 보고 나서야 끝이 났다.
수업 시작까지 일주일 남은 상황, 이 일주일 동안 평소에 쉰 것보다 더 격하게 쉬어야겠다. 이제 더 이상 할 말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