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s Spirit 11. 삼성전자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신호탄
2019년 4월 30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은 2030년까지 메모리반도체 1위를 넘어 시스템반도체 1위를 달성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2년 연속 영업이익 50조 원대를 기록한 직후라 기대가 컸으나 처음부터 일본 소부장 수출규제와 글로벌 팬데믹이라는 커다란 암초에 부딪쳤다. 메모리반도체 다음으로 시스템반도체를 석권하는 것에 해외 의존도가 높은 K-반도체의 기술 자립율을 높여야 하는 숙제가 추가된 것이다. 사람이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 어려운 것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기업이 체질을 개선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체질개선 11년 계획을 발표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다. 그런데 이번 주에 반도체 업계에 희망적인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 주 수요일 정부는 국가첨단산업 육성전략을 발표하며 경기도 용인시에 세계 최대 반도체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2042년까지 300조 원을 투자해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를 기흥, 화성, 평택부터 SK하이닉스가 있는 이천까지 연결하는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특히 시스템반도체 육성을 위해 파운드리 생산라인 5곳을 배치하고 소부장과 팹리스 기업 150개를 유치할 계획이다. TSMC와 미디어텍을 중심으로 디자인하우스부터 OSAT 업체까지 밀집되어 있는 대만 신주의 공업단지처럼 우리나라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주축으로 하는 세계 최대 공업단지가 생기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립각을 세웠던 정부와 기업이 한마음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선 만큼 앞으로 변화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도 첨단 팹을 건설하고 있다. 무려 20조 원이 넘는 금액을 투자했지만 원재료비와 인건비가 올라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독소조항이 가득한 반도체지원법을 들이밀며 미국 투자를 늘리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의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투자는 오만한 미국 정부에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으로 해석된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 테일러 팹보다 우수한 2나노 팹이 들어서면 세계 최고 성능의 반도체를 자국에서 생산하겠다는 미국 제조업 리쇼어링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TSMC도 애리조나 피닉스에 첨단 팹을 건설하고 있지만 2나노 팹은 자국에서 먼저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인텔이 여전히 7나노에서 헤메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전자와 TSMC의 반항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는 양질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 타인을 돕거나 자아실현을 이루겠다는 목표는 커녕 자기 몸 하나 챙기는 것도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실은 낮은 출산율과 행복도에서도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이윤추구라는 목적이 있지만 개인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서 더불어 사는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도 갖는다. 수십 년 동안 급속도로 진행된 세계화 속에서 삼성전자는 명실상부한 다국적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꽃이 피고 지는 와중에도 뿌리는 변하지 않듯이 삼성전자가 대한민국 기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삼성전자의 테일러가 아닌 용인에 투자를 결정한 만큼 경쟁력 제고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청년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얻어 행복한 삶을 꾸려가는 데에도 일조하기를 바란다.
이번 주 목요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국가첨단전략산업법과 더불어 K칩스법의 핵심인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대기업의 경우에는 8%에서 15%로,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16%에서 25%로 확대된다. 그동안 반도체 대기업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라며 반대하던 야당도 전기차를 비롯한 다른 전략산업 투자도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하는 조건으로 정부안을 수용했다. 그동안 여야 갈등으로 도저히 진전이 없을 것만 같던 K칩스법이 미국의 뒤통수 한방에 일사천리로 통과되는 것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찌 됐건 여야 모두 전략산업 육성에 국가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면서 앞으로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았던 규제가 하나씩 철폐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삼성전자는 유독 국내 투자에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공장을 건설하고 인력을 운영하는 게 경제적으로 유리하지만 혜택은 적고 조건은 많은 대한민국 세법도 국내 투자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소였을 것이다. 다른 국가에서도 정부가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지원하면 형평성 논란이 제기된다. 하지만 반도체와 삼성전자의 비교 대상은 국내의 다른 산업이나 기업이 아니라 미국 정부나 유럽 의회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에 육박함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소수였기 때문에 정부도 선뜻 지원하기 어려웠지만 미국의 배신으로 K칩스법이 신속하게 통과되었다. 얼떨결에 TSMC, 인텔과 같은 출발선에 선 삼성전자가 혼란을 틈타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경제학에는 성장의 방향성을 놓고 낙수효과와 분수효과 간에 끊이지 않는 논쟁이 있다. 양측 모두 일리가 있지만 지금처럼 성장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어디서든 물꼬를 트는 게 중요하다. 삼성전자는 국내에서 분기당 10조 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인데, 삼성전자마저 1분기 적자를 기록하면 경기침체에 진입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펌프에서 물이 나오지 않을 때 마중물을 붓는 것처럼 죽어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삼성과 SK의 반도체에 더해 현대차와 LG의 전기차가 세계 시장에서 주요 플레이어로 발돋움한다면 대한민국 경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도 있다. 금융, 통신, 음식료, 부동산에서 쥐어짜는 내수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솟아나는 수출로 글로벌 경제 강국이 될 수 있다.
이번 주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여 한일정상회담과 한일재계행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은 2019년부터 지속했던 반도체 핵심 소재 3대 품목 수출규제를 해제했고, 산업통상자원부는 화이트리스트 지위 회복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부에서 민간 외교관으로 활약하고 있는 4대 기업 총수도 방일 일정에 함께 하며 한일 관계 개선에 앞장섰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행사에서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며 한일 반도체 공급망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일본 역시 미국의 동맹국 압박과 유럽의 보조금 경쟁에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다음 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일정을 앞두고 한일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앞으로 국제 질서 체제에도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소부장 국산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소부장 수출규제 사태 직후 솔브레인과 동진쎄미켐 같은 업체들이 소재 국산화에 성공하며 발빠르게 대응한 덕분에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잘잘못은 논외로 하더라도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일본과 소모적인 논쟁을 그만두고 협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일본과 손을 잡더라도 소부장 국산화를 향한 움직임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거나, 반대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상황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4년 간의 일본 소부장 사태가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예방주사였다고 생각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향후 정치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20세기 내내 미국은 세계 질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큰형님 노릇을 했다. 그러나 중국의 추격에 다급해진 미국은 동생들의 밥그릇에도 욕심을 내고 있다. 반도체 원천기술과 유수의 팹리스를 앞세워 칩4 동맹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지만, 대한민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대만과 유럽이 등을 돌리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데 메모리반도체 생산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대한민국, 유일하게 미국의 소부장을 대체할 수 있는 일본, 가장 큰 파운드리 생태계를 보유한 대만이 힘을 합쳐 미국의 횡포에 반기를 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다. 칩4 동맹이 미국과 나머지가 아니라 다자간협의체라는 점을 일깨워야 한다. 다만 누구 하나라도 배신자가 나오면 나머지는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수도 있으므로 신중한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4년과 2027년 삼성전자 2030 비전은 두 차례의 중간고사를 치를 예정이다. 2024년에는 미국의 대선과 대한민국의 총선이 있는데 어느 정권이 당선되느냐에 따라 기업의 투자 규모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삼성전자의 3나노 2세대 공정 도입과 테일러 공장 가동이 시작되는 해로 수율 안정화를 통해 기술 격차를 줄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7년에는 중국 당대회와 대한민국의 대선이 있는데 각국 정부가 민심을 얻기 위해 펼치는 정책에 따라 기업의 전략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또한 삼성전자가 1.4나노 공정, 즉 나노 시대를 넘어 옹스트롬 시대로 넘어가는 해로 GAA 선제 도입의 이점을 누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반도체 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금주의 이슈들이 삼성전자가 2030 비전을 향해 마음껏 달려나갈 수 있는 신호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