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글쓰기, 단둘만 남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을 읽으며

by 절대음감

작가가 글을 쓰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작가는 혼자만의 공간에 있거나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아 있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거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거나 아니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속에서 작가는 펜대를 놀리거나 자판을 연신 두드린다. 그리고 이따금씩 글이 안 써질 때면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거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거나 한 손으로 턱을 괴거나 자신이 선호하는 오만가지 습관적 의식을 행한다. 아무 말 없이.


글을 쓴다는 건 침묵하는 것이다. 마치 수도승이 명상을 하는 것처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오롯이 글로 담아내야 하는 매우 섬세한 여정이다. 그래서 저자인 뒤라스(Marguerite Duras)는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혹여라도 글로 써야 할 것을 말이 채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Marcel Proust) 역시 말을 많이 해봐야 상대와 영영가 없는 여담만 오고 갈 뿐 글을 쓰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 듣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도움이 된다는 데에 이견은 없어 보인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한 인간의 세계를 간접 체험하는 것 그 자체가 글의 소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주로 듣기만 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히 되지만은 않는다. 인간에게는 말을 늘어놓음으로써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 일명 대화 나르시시즘(Conversational Narcissism)적 경향이 어느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상담을 수련했다는 나조차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샌가 내 얘기만 계속하고 있는 나를 목도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작가들이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오랜 시간 동안 말하는 대신 조용히 글을 써오며 스스로를 단련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동안은 철저히 혼자다. 글을 쓰기 위해 혼자임을 자처하는 거라고는 하지만, 삶의 결정적인 장면마다 혼자였던 기억들이 글을 쓰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를 비추어보면, 사랑이 떠난 후, 갈 곳을 잃은 후, 젊은 날이 지난 후가 이에 해당한다. 그중에서도 젊은 날이 지나갔다는 것은 감히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을 수도 없고, 반겨주는 곳도 점차 사라져 가는 총체적인 고독을 의미한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면 좋을까? 이참에 한 번 발상을 바꿔본다.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대신,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오로지 나 자신과 글쓰기 단둘만 남겨두기로.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사랑에 눈이 멀어 나다움을 상실하는 일도, 세간의 평판에 휘둘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포로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편집자였던 레몽 크노(Raymond Queneau)가 뒤라스에게 건넨 한 마디. "다른 것 관두고, 써요."만큼 와닿는 말도 없다. 누군가에겐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잃을 게 별로 없는 사람에게는, 가진 거라고는 나 자신 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실오라기와 같은 희망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글을 써나가며, 글쓰기가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 때쯤 고독은 어느새 무뎌져 갈 것이다. 그것이 고독이었다는 것마저도 망각할 정도로. 마침내 고독이 편안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 움츠려 있었던 본래의 나(True Self)를 글 속에서 마주하게 되리라고 나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편의 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무엇을 쓰게 될지 작가 본인도 정확히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글쓰기라는 광활한 황무지 앞에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글을 쓰지 않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개중에는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 같은 것도 있을 것이고,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도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 순간에 자기 안에 요동치는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글로 끄집어내는 것이야말로 나는 작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두고 뒤라스는 "말하기 어려운, 너무도 낯선, 하지만 한순간에 나를 사로잡는 것"이라고 표현했으며, 나아가 "내 안에 또 다른 미지의 인간이 있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혼자만의 과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찬찬히 뜯어보면, 그 근간에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던 기억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타인에게 선택받길 학수고대하는 한 인간과 타인으로부터 자유롭길 갈망하는 한 인간,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인간이 내 안에 모두 존재하고 있음을. 그렇게 본다면, 글쓰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재발견하여 언어로 담아내는 또 하나의 예술인 셈이다. 무엇이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야생의 문턱 앞에서 오늘도 나는 쓴다.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나를 향해. 그리고 이 글을 읽어 줄 미지의 당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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