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을 읽으며
코로나가 온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안온하기만 했던 2020년 1월의 어느 주말. 빽빽한 건물숲을 지나 배냇머리 같은 논밭 사이로 위용을 드러낸 한 리조트에서 대학원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를 진행하던 사회자가 대뜸 우리를 가리킨다. "자! 20학번 신입생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서 일렬로 서 주세요. 왼쪽부터 한 명씩 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윽고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가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20학번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된 ○○○입니다. 저는 현재 ○○○○센터에서 상담을 하고 있는데, 상담을 하면서 ~한 부분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대학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장은 가슴 밖을 뚫고 나올 것처럼 뛰었고 머릿속은 방역차가 소독 연기를 뿜고 지나간 듯 하얘져만 갔다. 난 당시에 퇴사를 하고 소속이 없었던 상황이라 동기들처럼 자기소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야 될까? 시한폭탄 같은 마이크가 얼음장같이 굳은 내 손에 건네졌다. 열브스름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애써 응시하며 학번, 학위과정, 이름을 밝히고 난 뒤 잠시 숨을 고르다가 조금은 다른 방식의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음... 저는 원래 학부에서 작곡을 전공했는데 저를 포함해서 예술전공자들이 가지고 있는 진로고민을 지켜보다가 상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가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숲 속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 대학원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 그 길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당시 내가 엉겁결에 말했던 그 길은 과연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이었을까? 프로스트의 시를 한번 재구성해보자.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한 편에는 잘 닦여진 길이 있고, 그 길만 따라가면 안전한 곳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 정해진 규칙을 준수해야 하고, 길잡이의 지시와 통제에 따라야 한다. 반대편에는 돌부리와 잡초가 뒤엉켜있는 척박한 길이 있다. 수풀에 가려져 앞에 뭐가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예기치 못한 위험에 노출되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없으며,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고 책임져야 한다.
음악전공자가 상담사가 된 경우가 원체 드물었기 때문에, 난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시가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에 가깝도록 내용을 재구성해 본 결과, 내가 걸어온 길이 결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학원, 상담학회, 상담센터 등 권위 있는 기관에서 마련한 시스템에 순응하고 잘 따라가야 상담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는 지도교수, 슈퍼바이저, 면접관의 존재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의 전형적인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능을 억눌러야 하고, 길들여져야 하고, 그 대가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표현과는 정반대로 "드 넓은 하늘의 경관" 대신 "고압적인 형상"이 사시사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길. 도제식 시스템 아래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던 10대, 20대 시절과 똑같은 길을 나는 또다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이 끼칠 만큼 똑같은 패턴의 반복. 언제나 자유를 갈망했지만, 실상은 자유에 역행하는 선택을 답습하고야 마는 모순. 지금 여기서 이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나를 지배해 온 무의식적 관념에 균열을 내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별빛을 볼 수 있게 해 줄 비장의 무기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는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매 순간이 성취다. 더 이상 누군가의 칭찬과 인정이 성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기만의 목소리가 아닌, 진짜 나의 목소리를 낸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해진 틀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므로 때때로 머리를 쥐어짜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겠지만, 언제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내 마음속 외딴섬에 당도할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와 부를 내려놓는 대신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의 정물화처럼 하찮고, 소박하고, 범속한 것들이 선사하는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도 있다. 누구나 꿈은 꾸지만, 막상 선택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이야말로 바로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100년의 세월을 초월하여 마치 나에게 일갈하는 듯한 버지니아 울프의 한 마디가 오늘따라 유난히 내 폐부를 찌른다. "누군가를 모방하지 말고 너만의 길을 따라야 한다. 그것만이 네 삶의 유일한 정당성이 되어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