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사람이 되겠다는 허상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를 읽으며

by 절대음감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성은애 옮김, 창비, 2014, 15쪽.

『두 도시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첫 문장. 이보다 매혹적인 도입부로 시작되는 작품은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이래로 본 적이 없다. 이 문장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단편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나라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남자이자 여초 집단의 일원이었고, 유순한 사람이자 고집 센 사람이었고, 격식을 차리는 사람이자 자유분방한 사람이었고, 어설픈 사람이자 꼼꼼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양면성이 나에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을 바라볼 때면 왜 그렇게도 지독한 선입견에 사로잡히는지. 겉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만을 보고, 곧잘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해버리곤 했다.


타인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을 내렸던 데에는 낯가림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본다.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등털을 세우고 잔뜩 경계하는 떠돌이 고양이처럼 위협적인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동물적인 본능 말이다. 다행히도 낯가림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차 옅여졌다. 급기야는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상담이라는 것까지 능청스럽게 하게 되었으니 가히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잔재는 남아있었다. 모르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매 순간이 경이로움의 연속이지만, 대학원이나 일터 등 공식적인 루트 안에서 만나는 사람으로만 한정했다. 적어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만큼은 믿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인 마리나 반 주일렌(Marina van Zuylen)은 이력서로만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건 영혼을 짓밟는 일이라고 했다. 각종 면접에서 떨어지는 게 다반사인 난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학원과 일터야 말로 이력서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들이었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무리에 속하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 같다.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한 미미한 존재로 남는다는 건 나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결정적으로 장사에 실패한 후 자수성가한 매제 밑에 들어가 고개를 숙여가며 일을 배워야 했던 아빠, 어린 나이에 상경해 취업 요건을 맞추기 위해 남의 이름까지 빌려야 했던 엄마의 인생담을 전해 들으며, 난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한 상류사회로의 진입, 즉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주창한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던 예수나 부처와는 반대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골몰하기 바빴다. 자연히 타인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나 업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완벽주의 성향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좋게 보면 그것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딴따라 음악'에 친숙했던 내가 어느새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 틈에, 직업 상담 영역에 있었던 내가 어느새 심리 상담을 하는 사람들 틈에 서 있게 만들었지만, 왠지 모를 서자 같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지나온 내 삶의 흔적을 어떻게든 지워내려 안간힘을 썼다.


결과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무리에 들어가는 데는 성공은 했지만, 언제든지 대열에서 낙오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쫓아다녔다. 타인의 평가에 내 감정을 위탁했고, 능히 다룰 자신이 없는 난해한 현대 음악이나 자살·자해 상담에 대해 애써 잘 이해하고 있는 척 눈치를 살펴야 했다. 클래식 음악이나 심리 상담 그 자체보다는 '정통성 있는 본류'에 편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앞섰던, 다시 말해 주객이 전도됨으로써 발생하는 후과를 온몸으로 떠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양면성을 보기는커녕 특별한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들, 전문가 집단과 비전문가 집단, 본류와 아류,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양분하는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은 자신만의 장소라서, 제 스스로 천국을 지옥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존 밀턴(John Milton)의 시구처럼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결과만을 보고 모든 걸 판단하는 냉혹한 환경은 모두 내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돌고 돌고 돌아 나는 작곡가도, 상담사도 아닌 그 어떤 범주로도 분류되지 않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20여 년 간의 특별했던 순간들, 20여 년 간의 평범했던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는 그 토대 위에 나라는 사람이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가 시키지 않아도, 어떠한 이득이 되지 않아도 글을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출간작가가 되겠다는 야심마저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필명으로 활동하는 거리의 화가 뱅크시(Banksy)나 은둔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의 사례처럼, 특별한 위치에 오를수록 사람들의 반응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될 테니 무언가가 된다는 게 꼭 능사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중요한 건 특별함과 평범함의 관점에서 벗어난 실존 그 자체에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삶이 아닌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삶, 어딘가로 가기 위한 삶이 아닌 어디에 있든 연연하지 않는 삶, 그리고 결과로 증명하는 삶이 아닌 실존을 증명하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점차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내가 아닌, 타인의 숨겨진 진가를 먼저 발견하는 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를 옥죄던 불안과 조바심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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