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키츨러의 『철학자의 걷기 수업』을 읽으며
요즘에는 거의 들을 수 없지만 옛날에는 용달차가 후진을 할 때면 목청 큰 아저씨의 "오라이~ 오라이~"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전자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엘리제를 위하여〉 아니면 〈즐거운 나의 집〉. 하나는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소품이고, 다른 하나는 오페라의 아리아로도 쓰인 가곡이니, 서양에서 고상하기만 했던 음악이 동쪽 맨 끄트머리 있는 나라에 와서 조악한 사운드의 키치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란히 1800년대에 작곡된 음악이라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 말고는 왜 이 음악들이 용달차의 후진음이 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래도 나름 사랑과 집에 대해 논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인생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이 두 가지를 미약하게나마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영혼을 거세게 뒤흔들어 놓는 사랑과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는 집. 어찌 보면 상반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사랑의 결실이 있었기에 집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이라는 공간에 들어설 때면 설령 버선발로 달려 나와 반겨주는 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나를 감싸는 듯한 포근한 온기와 내 집이라는 걸 식별시켜 주는 익숙한 냄새만으로도 마음은 벌써 편안해진다. 옷을 갈아입고 소파나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온종일 외부를 향해 있던 '감지 안테나'를 접어버리고 나면 적막한 가운데서 비로소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래서 나 같이 예민한 HSP(Highly Sensitive Person)들에게는 집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런 나조차도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간밤에 널어놓은 빨래가 뽀송뽀송하게 마를 만큼 쾌청한 날 자연 속을 한가로이 거닐 때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을 할 때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요새와도 같은 공간이 내가 그토록 예찬했던 집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행동주의 심리학자 클라크 헐(Clark Hull)은 그 답을 알고 있을 것 같다. 집안에서 충족하지 못한 것을 집 밖에서 충족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맞추려 하는 거라고. 이미 집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는데, 집 밖에서 마저 사무실 같은 곳에 갇혀 홀로 서류를 들여다본다고 상상해 보면 숨이 턱 막힐 것 같기는 하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봐도 엑스배너를 낑낑 짊어지고 밖으로 나가 상담부스를 운영할 때와 동료직원과 함께 외근을 나가 몰래 군것질도 해가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였다.
그렇게 본다면, 나 자신을 정적인 삶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옭아맸던 건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해 버리는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안에 '선택받길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길 원하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듯이 다른 한편에는 친구들과 공을 가지고 뛰어놀던 동적인 사람도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통해 '정적인 나'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면, 그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동적인 나' 또한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라고 해서 마냥 글만 쓰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때때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평소에도 걷는 시간을 따로 정해놓는 걸로 알고 있다. 보스턴 마라톤을 여섯 번이나 완주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 春樹)의 유별난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400여 년 전에 이미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움직이지 않으면 정신은 꼼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들과 같은 전업작가는 아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동적인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이를테면, 머리가 아니라 다리가 움직이는 일,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일, 그리고 일과가 끝나는 즉시 손에서 놓아버릴 수 있는 일 말이다. 일과를 마치고도 집에 가져와서 정리해야 하고, 다음날 해야 할 것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일은 나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함은 물론 끝없는 불안과 긴장상태를 유발할 게 불 보듯 뻔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날품팔이를 하는 게 낫다고도 했다. 최소한 날품팔이는 일과가 끝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마음껏 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알베르트 키츨러(Albert Kitzler)는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는 이유는 성공, 명성, 지위, 재물, 평판과 같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면의 평온을 위한 자연 속에서의 걷기나 예술적 활동 등을 제안한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나는 내적이며 관념적인 영역에 가까운 독서와 글쓰기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정작 외적이며 체험적인 영역에 가까운 신체활동이나 타인과의 만남 등은 등한시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에서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었다. 어쩌면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불균형 상태에 처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변화를 도모하는 것만으로도 균형을 잡는 데 상당 부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이 위대한 이유는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결국엔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데에 있다. 그 거룩한 섭리를 본받아 내 안에 있는 모든 모순된 면들이 베토벤의 음악처럼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고 싶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디에 있든 내가 있는 곳이 곧 '즐거운 나의 집'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