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에서의 단상
한 겨울인데 영상 10도라니, 이때 아니면 추워서 못 간다 싶어 한달음에 숲으로 갔다. 가장 처음 마주한 광경은 사방이 온통 뿌연 잿빛으로 물든 숲. 건조하다 못해 차가움까지 집어삼킨 듯하다. 습하다는 게 달라붙음이라면, 건조하다는 건 떼어냄이니 그야말로 '각자도생'을 연상케 한다. 우리네 삶은 또 어떤가? 끊임없이 선택받아야만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격전장이다. 적자가 되지 못한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 주체가 되는 '독자생존'의 길을 택했으니 '거부를 거부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냉혹한 겨울의 숲에서는 쉬는 게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몸이 얼어붙지 않으려면 계속 걸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생존본능을 마구 자극하는 것 같다. 비록 10년 전 그때처럼 여전히 똑같은 골방에 홀로 있지만, 그래도 생존본능 덕분에 늦은 나이에 공부도 해보고, 설레는 데이트도 해보고,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타지 생활도 해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캠퍼스의 낭만도 누려볼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게 나는 살아왔고, 살아냈다.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니 사방으로 온통 진창길이 펼쳐진다. 진창길을 피하려면 한 사람 밖에 지나갈 수 없는 외나무길로 가는 수밖에는 없다. 외나무길로 가면 진흙이 묻지 않으므로 나의 고유함이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에서는 혼자임을 감내해야 한다. 반면 진창길로 가면 발이 점점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므로 가면 갈수록 나의 순수성은 오염될 것이다. 그러나 셀 수 없이 찍혀 있는 발자국의 흔적처럼 그 길에선 사람들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독'의 반대말은 '소속'이 아닐까 싶다.
침잠의 기운이 감도는 겨울 숲에서 가장 반가울 때는 초록빛을 만날 때다. 바야흐로 '초록일색'이 아닌 '초록희귀'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나 홀로 연녹색 피셔맨 스웨터를 입은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꼬부랑 노인의 주름살처럼 쩍쩍 갈라진 나무줄기에 이끼가 내려앉아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노라니 청춘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불과 1년 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들 덕택에 나도 나이를 잊은 채 젊음에 동화되어 생기를 느껴볼 수 있었다. 내 나이에 이런 특권을 누려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특권이다.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목에는 아직까지도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 알록달록한 가을의 잔상이 남아있다. 역시나 '일색'보다는 각자 다채로운 색을 뽐내는 '각양각색'일 때가 아름답다. 그러고 보면 난 '일색'에 속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대학원에서도 일과 학업을 병행했던 동기들과 달리 혼자만 풀타임 대학원생이었고, 인턴상담원을 할 적에도 유일한 남자이자 또 유일한 타대학원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일색'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외를 낳는다. 나 혼자만 다르니까.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그 자체로 주목의 대상이 된다. 나 혼자만 다르니까. '일색'이랄 게 따로 없는 '각양각색'의 세상에서는 어떨까? 이질감이 들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서로의 차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무릇 그런 것이다.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러나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모든 종류의 폭력, 혐오, 편견, 갈등,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