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강 에세이 - 이 별에 관하여 ,
2박 3일의 가족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의 짐을 정리하고 씻은 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일요일에는 종일 누워있었다고 말했다. 짧은 대화로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여느 때의 루틴처럼 아침에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에게 출근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출근 잘하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잘 도착했는지 묻고 오늘도 힘내라는 말을 서로에게 건넨다. 점심 즈음에 밥은 뭘 먹었는지를 퇴근 시간이 다되어서는 퇴근은 잘했느냐고 물었다. 불안한 마음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의 루틴은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종료시켜야 하는 건 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가 미워졌다.
이 날은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자르는 날이었다. 퇴근을 하자마자 머리를 잘랐다. 나는 머리를 자르면 셀카로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 후 잘 정돈된 상태를 사진으로 남겨 나중에 스타일링할 때 참고하려고 사진을 찍어두는 편이었다. 여자친구가 없을 때는 친한 대학선배에게 늘 보내곤 했다. 여자친구가 생긴 이후로는 줄 곧 여자친구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날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 퇴근 후에 머리를 자른다는 말은 했던 것 같은데 사진은 보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머리를 잘 잘랐는지 물어본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고 집에 도착한 나는 그녀에게 저녁은 잘 챙겨 먹었는지 간단히 묻는 등 자기 전 짧은 통화를 마쳤다.
화요일 아침이 되었다. 월요일과 똑같은 불안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머리도 전보다 짧게 잘랐고 뭔가 다시 애매해진 것 같은 우리 관계에 대해 오늘 만나면 이야기를 해볼 참이었다. 내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은 못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모든 걸 따를 생각이 있었지만 헤어지자는 말은 따를 생각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3시 무렵, 나는 그녀에게 저녁을 먹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말했다.
"나 이제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하자,,,,"
최근에 새로운 직원이 입사해서 신입 교육과 일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무단히 애썼던 내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가슴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머리는 하얘졌다. 무슨 말을 이어서 해야 할지 도통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내뱉은 두 번째 이별 통보에 대해 읽어버린 나는 어떤 말로 대꾸를 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는 차분한 척 이야기한다.
"나도 오늘 만나서 말하려고 했어."
"그날 데이트하면서 우리 관계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도 혼란스러워서 자기 마음이 어떤지 오늘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어."
그녀는 내가 이어서 보내는 메시지에 짧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3주 전 비슷한 시간대에 아무 전조증상 없이 이별통보를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되돌리기에는 우리 관계가 끝이 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이기에 잠시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처음 그녀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내 상태가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여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는 모두 휘발되어 사라졌다. 아니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짧은 답변을 듣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그녀가 나에게 줄지도 모를 커다란 상처보다 딱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한테는 더 중요했다.
내 집에는 여전히 그녀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와 처음으로 주말마다 내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을 무렵, 내 집의 위생상태(그녀는 청소도 자주 하는 편이었고 지저분해지면 바로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가 맘에 안 들었는지 청소용품을 몇 개 가지고 와서는 내가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는 주방의 찌든 때를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그녀가 가져온 까끌까끌한 재질의 수세미로 세면대부터 변기까지 광이 나도록 닦았다. 주방의 청소를 마친 그녀는 물티슈를 들고 다니면서 방구석구석의 먼지와 찌든 때를 닦아내며 먼지가 자주 쌓이는 곳은 먼지만 전용으로 닦아내는 천을 사용해야 한다면서 내게 집에서 쓰던 청소용품도 가져다 수납함에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8년 가까이 살았지만 입주 청소를 받고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깨끗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청결에 조금 집착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청소에 미친 사람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녀가 내가 준 편지나 다른 선물들을 어떻게 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떠올려보니 아마도 그녀는 하얀 종이가방에 내 속옷과 양말을 가지고 나왔을 때, 이미 모든 흔적을 지웠을 것이다. 다행히 내 집에 그녀의 옷가지들은 없었지만 그녀와 마셨던 술(같이 마시려고 산 화이트 와인도 있었다)이 냉장고에 남아 있었고 그녀가 좋아해서 가져다 놓은 안주거리도 주방 찬장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내 집에서 잠을 잘 때 사용하려고 가져다 놓은 화장품 샘플이 지퍼백 채로 그대로 있었다. 이 물건들을 그녀는 필요 없어할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마지막으로 만나 그녀에게 돌려주며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돌려받고 싶은 게 책이 하나 있었다. 그 책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그녀에게 처음 고백하던 날, 나는 그 책 사이에 나의 마음을 꾹꾹 눌러쓴 메시지로 그녀에게 고백했었다. 그녀는 이 말을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들으며 연신 입가의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당신이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모든 순간을 사랑하겠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 말을 생각해 낸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너 개의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중에 이 말이 내 말 같아서 그녀에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말을 해놓고 내가 참 로맨틱한 사람이구나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면 저절로 사랑의 말들이 떠오르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말했다.
"자기가 우리 집에 두고 간 물건들도 있고 내가 주었던 거 다른 건 몰라도 책은 돌려받고 싶어."
"퇴근하고 잠시만 시간을 낼 수 없을까?"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싫어. 보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나머지는 알아서 해. 그냥 버려도 되고"
이 순간 그녀를 붙잡는 건 그녀를 더 힘들게 하는 거라 생각했다. 무얼 더 묻고 답을 들은 듯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그녀는 나를 좋아해 줘서 너무 고마웠다는 말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나도 그동안 유정 씨(가명) 때문에 너무 행복했어.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사귀고 난 이후로 나는 그녀의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다. 처음 만나고 사귀게 된 이후 줄 곧 같은 애칭으로 서로를 부르던 사람. 그 사람의 이름 뒤에 "씨"라는 어색한 존칭을 붙여 그녀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메시지에 남겼다. 그러니 이별이 눈앞에 와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 그녀는 웅 그럴게.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은 채 숫자 1을 없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