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여기서 등장하는 '그'는 남편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겠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만났던 사람, 남편을 만나게 해 준 귀인이기도 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이 사람에 대해 글을 쓸 일이 있을 것 같았는데, 키를 주제로 등장시켜서 미안하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모든 감정은 날아갔어도 내가 그를 많이 좋아했다고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키라서 그렇다.
머릿속에서 그와 나를 나란히 세워두길 삼백 번 정도 반복했을까. 처음엔 너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가, 나쁘지 않네, 그러다가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 순간, 나의 기준을 깨뜨릴 정도로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그가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감정의 고조가 거의 메타인지급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어쩌면 '나보다 키가 커야 한다'는 조건에 충족되지 않았기에 그를 나의 바운더리에 쉽게 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남들보다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게 된 그의 생각과 취향은 섬세하고 특별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특별했던 점은 키 큰 여자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가 키 큰 여자를 특별히 좋아한 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여자들 중 키가 큰 나도 포함되었던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저 자기보다 키가 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멀리하지 않았다는 점이 고마웠다. 키 큰 여자는 멋있다고, 키 차이가 나는 유명 배우 부부를 멋진 커플이라고 언급하는 그가 되려 멋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다. 밀당이란 걸 할 수가 없는 성격 탓에 시원하게 고백이란 걸 부어버렸다. 그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건 그는 나를 줄곧 '동생으로만' 여겼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그는 오빠 동생 사이에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자기를 이만큼이나 좋아한다고 하니 다시 보였는지, 뒤늦게 전해온 그의 마음에도 나는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줄곧 전해오는 그의 마음에 나는 다시 조심스레 그와의 미래를 그려보고 있었다.
모래 위에 새긴 글자처럼 감정의 파도가 지나가면 자꾸만 지워지던 우리의 마음들. 어긋난 고백만 주고받길 반복하다가, 여기저기 찔러보는 것 같은 그에게 실망했다가, 짜게 식어버린 내 마음을 두드리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도 결국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던 것뿐이겠지만, 당시에는 겉과 속이 다른 남자라고 생각했다. A라서 a로 읽었다 정도가 아니라, b와 c로 읽어버리는 그의 태도에 나는 혀를 내두를 만큼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A다음에 B를 떠올릴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너른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때론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 더 너그럽기도 한 것 같다. 그를 내 생활 반경에 쉽게 들였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니까. 어쩌면 그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그간 체한 듯 답답하면서도 그에 대해 간직하고 있던 수많은 물음표들이 하나도 펴지지 않은 채 나의 마음을 갈퀴었다. 억지 문장에 마침표를 찍듯 서둘러 마무리하려 했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은 채 지쳐서 끝나버린 관계의 회한 속에서, 나는 의뭉스럽지 않은, 겉과 속이 똑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단 소망을 품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약 2년이나 마음을 썼다. 어쩌면 그렇게 자꾸 어긋나면서도 연결되었는지. 놓지 못한 마음이 닳고 닳아 버려졌을 때쯤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었다. 알게 된 지 2개월, 만난 지 겨우 두 번만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러니 이건 모두 남편을 만나기 위해 겪은 일일 뿐이다.
다른 남자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써도 되는지, 과연 이것을 발행해도 되는지 살짝 고민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키에 대한 이야기이자 남편을 만나게 해 준 귀인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지금의 남편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준 그에게 늘 감사하다. 역시 마무리는 훈훈하게. 끝.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