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번 이야기는 내가 만나왔던 일부 남자들로 인해 축적된, 미천한 데이터에 근거한 추측일 뿐이다. 더군다나 나는 남자가 아니므로 남자들이 키 큰 여자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 같은 걸 알 리 없다. 다만 은근히 천대받던(?) 키 큰 여자로서 늘 알고 싶어서 오랫동안 생각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아, 나 네 옆에 있으면 안 되겠다."
나더러 저리 가, 까진 아니지만 슬금슬금 나를 피해 저만치로 달아나던 남자들이 십중팔구였다. 자기의 덩치를 넘어서는 여자에 대한 위압감 혹은 부담감 때문이었겠지만, 그건 내게 별 관심이 없단 방증이기도 했다. 키가 크든 말든 관심 있는 여자라면 어떻게든 곁을 맴돌 테니까. 그건 마치 벌이 꽃을 좇는 것 같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거늘 공개적인 거리 두기라니. 얼굴이 작은 사람 곁에서 사진 찍고 싶지 않은 것과 비슷한 마음이겠지, 이해하면서도 괜히 민망했다.
어느 유투버가 말하길 대부분의 여자들이 남자의 얼굴보다 키를 우선순위로 내세우는 것처럼, 남자들은 여자의 키보다 얼굴이 우선순위라고 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나는 그들에게 큰 키를 커버할 만큼의 얼굴도 아니었던 셈이다. 어찌 됐든 나는 어릴 때부터 남자들의 기피대상이었다. 오죽하면 멱살까지 잡혔을까.(지난 화 참고: 동네 오빠에게 멱살을 잡힌 까닭)
키 큰 여자를 선호하는 남자들도 왕왕 있었다. 가령 내 남편 같은. 그런 남자들은 키 큰 여자인 내 입장에선 귀하고 귀한 존재였다. 그러니 지금껏 나와 썸이 있던 남자들은 내게 모두 유니콘이었던 셈이다. 적어도 그들은 나를 '피해서'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틈만 나면 내 곁에 서서 목을 길게 빼거나 까치발 하는 시늉으로 '내가 더 크다'며 우쭐대던 남자, 키 큰 여자와 키 작은 남자 커플을 보며 멋지다고 치켜세우던 남자, 키가 큰 나더러 '귀엽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던 남자(나는 아주 자세히 보아야만 귀엽거늘!), 모두 나를 설레게 했던 남자들이다. 철벽녀이기도 했던 내가 결국엔 마음을 열었던.
단순히 자신감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키 큰 여자를 감당(?)하는 게 남자의 자신감의 문제라면, 키 큰 남자들이 키가 작고 아담한 여자를 선호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키만으로 따지자면 자신감이 넘쳐야 할 키 큰 남자들도 키 큰 여자와 커플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적어도 내 주변에선 그랬다.(그런 커플은 확실히 눈에 띈다.)
그렇다면 취향의 문제일까? 그런데 왜 키 큰 여자를 선호하는 취향을 가진 남자들은 유니콘처럼 희소한 것일까? 피지컬의 차이는 여성에게 있어서도 '이성으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키만으로 남자들에게 대놓고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 키 큰 여자 입장에선 '나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거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섣불리 '피하지 않고' 그 옆에 있기만 해도 키가 작은 남자와 키 큰 여자 커플의 탄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남자의 큰 덩치에 자연스레 가려지지 않더라도 여자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남자의 우직함이다. 여자는 나를 가려주는 존재가 아닌, 기댈 수 있는 존재를 갈망한다. 기가 세다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멀리 도망가버리는 남자들로 인해 나는 종종 우두커니 선 나무가 되었다. 거대하고 딱딱해 보여도 여자의 마음은 갈대다. 그 곁에서 한 줌의 그늘을 선사하고 한 자락의 바람을 막아설 수 있는 남자라면 충분하다. '키 작은 남자는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아직 그런 남자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자신을 기피하던 남자들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자기 방어일 수 있다.
키가 174cm인 개그우먼 장도연 씨가 '남자의 품에 폭 안겨보고 싶지 않느냐'던 박미선 씨의 질문에 '누우면 된다'라고 했다. 옆으로 누워서 밑으로 한없이 내려가 안기면 된다는 말이다. 현답이다. 이 인터뷰를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듯이, 물리적인 품은 조금 작더라도 나를 안아줄 만큼 품이 넓은 남자, 내가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의 남자라면 어떻게든 안길 방법은 있는 것이다.
키가 크든 작든 가장 매력적인 여성의 외모는 어떤 것일까? 내 생각엔 여성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스러움은 귀여운 언행에서 주로 묻어난다. 귀여우면 끝난 거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그런데 살면서 키 큰 여자들 중 귀여움까지 장착한 여자는 많이 못 봤다.(하물며 연예인들 중에서도 장원영밖에 떠오르지가 않는다.) 반면 여성스러움은 키가 크지 않아도 헤어스타일이나 피부 등 충분히 다른 요소들로 어필이 가능한 영역이므로, 남자들 입장에선 당연히 여성스럽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여자를 선호할 것이다(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키 큰 여자가 여성스러움을 좀 더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키 큰 여성들이 여성스러움을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똑같이 나시티를 입고 반바지를 입어도 드러나는 팔과 다리의 면적이 길어서 그런지 뭔가 더 야해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학생 시절, 교회 회장 오빠가 나를 따로 불러서 바지가 너무 짧으니 옷 착용에 주의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앞에서 마이크 잡고 찬양하는 여학생은 반바지가 아니라 핫팬츠를 입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애석하게도 당시 나는 부회장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후 나는 치마는커녕 짧은 반바지도 입고 다니지 않았다. 성격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키가 큰 것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어쩌다 보니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패션을 선호하고, 모델같이 시크한 스타일은 그 시절 나의 추구미가 되었다. 옷 잘 사주는 오빠(남편)를 만난 뒤 미니스커트를 실컷 입어봤다. 내 나이 이십 대 후반에서야.
나처럼 소심한 키 큰 여자는 안 어울릴까 봐, 혹은 과해보일까봐 사랑스러움과 여성스러움 둘 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그저 멋지고 시크한 '언니'가 되거나, 도도하게 걸어 다니는 전봇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키가 크고 작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마다 키가 큰 것 혹은 작은 것이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고, 나 또한 그랬지만 (다음화 예고: 저보다 딱 1cm만 커도 좋겠습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기준이 깨지고 나서야 내가 이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알 수 있었다.
나보다 키가 커서, 혹은 크지 않아서 머뭇거리게 되는 마음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 벽을 뚫고 나오는 마음이야말로 진짜가 아닐까. 철벽같이 세운 기준이 키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남자들이 키 큰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나 '여자들이 키 작은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따윈 없다. 키가 크든 작든 결국 '내 눈에 예쁜 여자', '내 눈에 멋진 남자'를 좋아하게 될 테니. 그러니 움츠러들지 말고 당당하면 될 일이다.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