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이유로 싫어지는 사람이 있다. 전자가 내가 보듬고 싶은 부분이라면 후자는 몰아내고 싶은 부분일 것이다. 그와 내가 닮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처음엔 그녀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안고 있는 연약함이 내가 알고 있는 연약함이라 안쓰럽기도 했다. 도울 수 있다면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았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이너스에 가까워졌다. 나이와 직급이 나보다도 윗단계인 그녀를 조용히 서포트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은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행동할까. 왜 저렇게 말을 할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되다가 어느새 결론을 내버렸다.
일처리의 미숙함에서 비롯되었을 자신 없는 태도는 일견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겪고 있을 내면의 혼란을 먼저 헤아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상사를 대하는 무례한 태도로, 무책임한 발언으로, 동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행동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 내게 악함으로 여겨졌다. 내 안에서 몰아내고 싶었던 악함이 그녀의 존재로 다가왔다. 그녀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악함은 곧 약함이라는 걸.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인 C.S루이스는 사랑에 대해 말하길 경계를 긋기 위해 분명히 말하는 것도 사랑이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도 사랑이 될 수 있지만, 미워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적은 증오를 원하고, 미움이 퍼지길 바라며, 관계가 깨지길 기대한다. 그러나 사랑은 어둠이 견딜 수 없는 무기이다. (C.S루이스)
그러므로 나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그녀도 나와 같이 악한 자의 공격을 받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회피본능이 강한 그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말씀(마 5:7)처럼, 흑암을 무너뜨리는 그 사랑이 나와 그녀의 삶에 충만히 임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둠의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후서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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