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라니. 잠시만. 내게 일행이 있었나? 이 사람은 왜 나의 일행이 되었지? 나영은 남자에게 틈을 주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막을 새도 없이 그야말로 훅 들어왔다. 게다가 어디서 뭐 하다 온 지도 모르는 낯선 남자와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상책이라 믿었건만 지금은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
"사적인 대화가 부담스러우시면 백 분 토론도 좋고요. 제가 두 시간 뒤에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는데... 아, 가는 시간도 있고 십 분 먼저 도착하는 게 예의니까 딱 백분 남았네요."
영훈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영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 수상한 작업의 목적이 백 퍼센트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에 조금 안심했다.
"저 시간 없는데요."
나영이 고양이의 낯을 갖게 된 건 타고나기도 했지만 새초롬한 표정이 한몫했을 것이다. 사실 시간이야 많았다. 작정하고 카페에 책을 가져왔으니까. 오늘은 아무 근심 없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웬 남자가 나타나서 방해를 한다. 우선은 계획에 없던 일이니 거절하고 본다. 나영은 PJ니까. POWER J.
"저도 시간이 없었는데요, 갑자기 생겼어요. 그러니까 제 시간을 나눠드릴게요."
그런데 이 사람은 조금 신박하다. 누가 누구에게 나눠준다는 건지, 익살스러운 말이어도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나영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순수한 건지 뻔뻔한 건지 해맑은 표정으로 농을 건네는 남자는 확실히 호감형이었다. 이런 비호감적인 행동을 해도 밉지가 않은. 정확히는 남자의 웃는 얼굴이 예뻤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게 익숙한 나영에겐 영훈의 얼굴이 하나의 신기한 풍경이기도 했다.
나영은 잠시 고민했다. 책을 읽다가 생각하는 시간에 나영은 꼭 책을 덮은 채 표지를 쓰다듬는 버릇이 있었다. 59쪽에 책갈피를 끼운 뒤 이번엔 책을 두 손으로 세웠다. 확인할 게 있었다.
"아까 그 사람, 아는 사람이에요?"
"누구요?"
"들어오려다 나간 사람이요."
"아아, 아니요."
방금 한 대답은 거짓말로 쳐야 할까 아닐까,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말은 아니지. 그런데 이 여자는 이걸 왜 물어보나, 소개팅 차림인 게 너무 티 났나? 영훈이 머릿속으로 빨리 달리는 동안 나영은 이미 어딘가에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