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은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범죄자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자주 폭행을 당했고, 제대하자마자 개명했다고 했다.
"이름에 꽤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 이유로 개명하다니 안타깝네요."
그래도 영훈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려요,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쨌든 영춘이라는 이름 덕분에 기억해 낼 수 있었으니까.
"갖다 댈 걸 대야지, 진짜. 어린애들도 아니고 이름 가지고. 하여간 군대에서 인류애가 다 사라졌다니까. 그렇게 사람 좋아하던 내가 전역하고 나선 그냥 조용히 살았거든."
나영은 영훈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비슷한 시기에 인간에 대한 회의감을 겪었고 웃는 얼굴도 잃어버렸다. 소속 집단과 환경을 바꿨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영훈의 얼굴은 여전히 따뜻했다. 이름을 바꿨어도 봄의 기운이 그를 덮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다시 웃게 한 걸까 나영은 궁금해졌다. 사람에겐 고유한 색이라는 게 있을까. 그 색을 잃지 않는 방법 같은 게 있을까. 잃었다가 다시 되찾을 수도 있는 걸까. 아니면 색이 섞여버린 물감처럼 점점 더 탁해져 갈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게 결국 나의 색이 되는 걸까.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영훈이 옅은 미소를 띠고 말하는 동안, 나영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잔잔한 수채화를 감상하듯 영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을 마친 영훈이 나영과 눈을 마주치자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나영은 몇 해 전 어느 봄날이 떠올랐다. 오랜 칩거 끝에 커튼을 걷어냈던 날이. 암막 커튼마저 뚫고 밖에서 새어드는 빛이 나영을 간질였고, 마침내 활짝 걷어냈을 때 밝은 빛이 쏟아졌다. 나영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던 그날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풀처럼 덥수룩한 머리와 두꺼운 안경에 가려있었어도, 십 년 전 그의 얼굴엔 봄처럼 따스한 기운이 피어났던 걸 기억했다. 새내기 시절의 들뜬 기분과 캠퍼스의 분위기, 동아리 가입을 권하는 그의 얼굴이 조화로워 선뜻 결정했던 것도. 흐지부지 발걸음을 하지 않다가 별 고민 없이 그만두었던 것도. 가볍게 날아다니던 그때가 왠지 모르게 그리워졌다.
"그런데 분위기가 아예 달라졌네. 너 신입생 땐 잘 웃었던 것 같은데... 웃는 얼굴이 예쁘기도 했고."
"십 년 전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이었잖아요. 그동안 세상 풍파 맞아서 그렇죠, 뭐. 웃으면 사람들이 만만하게 본다니까요."
"웃으면 복이..."
"특히 남자들은 조금만 웃어줘도 자기한테 관심 있다고 착각하는데 정말 피곤해요. 이것 봐요, 심지어 웃은 것도 아닌데 눈 좀 마주쳤다고 이렇게 앞에 와서 앉아버리고."
고양이 발톱으로 할퀴는 것처럼 정곡을 찌르는 말에 풍선이 터지듯 영훈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러면서 십 년 전 동아리 부스 앞으로 나영을 불러 세웠던 이유가, 오늘 이 테이블 앞에 서게 된 이유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해도 나영은 나영이었다. 그녀에겐 이목을 끄는 아우라가 있었다. 지금에 와선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남자들이 많진 않겠지만 그걸 두 번이나 해낸 영훈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웃어주지 않았어도, 눈 안 마주쳤어도 난 여기 와있었을 걸."
영훈이 아무렴 어때, 하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웃든지 말든지 나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영은 영훈을 미소 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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