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착각

by 조이


이나에 대해 알아갈수록 나영은 무척 의외라고 생각했다. 나영의 가정환경은 평범했던 데 비해 이나는 가난한 축에 속했다. 아빠의 회사 일 때문에 전학 갔다던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나의 아빠는 그보다도 훨씬 전에 돌아가셨고 엄마 혼자서 어렵게 생계를 책임져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 지속된 가난에 비해 이나는 그런 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영은 짐짓 놀라면서도 가난의 티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티가 나는 가난과 그렇지 않은 가난의 차이에 대해서도.


"나 그때 전학 간다고 했을 때도 말이야." 이나는 한쪽 손으로 기울인 얼굴을 받친 채 다른 한쪽 손으로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 손에는 당시 유행하던 알이 큰 가죽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엄마는 식당에서 멀어진다고 싫어했어. 고작 그런 이유로. 자기 식당도 아니었으면서..."


나영은 테이블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이나의 푸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힘들었겠지." 술에 취해 얼굴이 달아오른 이나가 아랫입술을 내밀며 푸 소리를 냈다. 앞머리가 입바람에 휘날렸다. "그런데 그깟 출퇴근? 나는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야 하는데. 날더러 그걸 버티라고..."


전학을 갔던 이유가 이나에게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나영이 기억하는 이나는 반 분위기를 잘 맞추고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아이였다. 딱히 학교생활에 문제는 없어 보였는데 그렇게 힘들었나 싶어 나영은 괜히 미안해졌다. 그랬어? 몰랐어,라는 말은 추임새가 되어버렸다. 몰랐다는 말 앞에 정말, 전혀, 진짜, 하나도 따위의 부사들을 힘주어 덧붙여야만 간신히 면피가 될 것처럼 나영은 최선을 다해 이나를 들어주었다.


한편으로는 그때 알았다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었을까, 나영은 무력함과 무용함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도 이렇게 술자리에서 들어주는 것밖에는 하질 못하면서. 이마저도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한 푸념일 뿐이었다.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해 온 자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이나의 푸념은 고백에 가까웠고, 그녀의 고백은 아픈 구석이 있었다. 구멍 난 간격을 메우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몰랐겠지. 아무도 몰랐을 걸. 그때 나랑 친한 사람이 없었잖아." 이나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친해지는 법을 몰랐어."


"그래도 괜찮아 보였어. 너에겐 어떤 벽 같은 게 느껴졌거든. 다들 그걸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 나영이 서둘러 대꾸했다.


"맞아, 그렇기도 해. 내가 그걸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나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런 방식으로 깨뜨리면 안 되는 거잖아."


"뭐라고?"


순간 소란해진 분위기에 나영이 되묻자, 이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선 나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처연하여 나영은 이제 듣기를 멈추고 말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뭐라도, 무슨 말이라도 그 눈에 넣어줘야 할 것 같았다. 허기와 냉기가 가득 찬 그 눈동자 속에.


"힘들었겠다... 너 말이야." 엄마가 아니라, 언니가 아니라 네가 힘들었겠다고 나영은 콕 집어 말해주었다.


"고마워. 충분히 위로가 되었어."


습관적으로 지어 보인 듯한 이나의 엷은 미소가 그날따라 유난히 위태로워 보였다. 모든 습기를 머금고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이나는 거미줄같이 가느다란 미소가 매달린 입술로 다른 말을 내기보단 후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이나는 스스로 정해놓고 있었다. 그것을 나영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나영은 늘 이나가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걸 묻지 않았다. 찰랑찰랑, 목 끝에서 차오르다 뱉어내야 할 때가 되면 그때서야 이나는 말해주었다. 나영은 그 타이밍을 잘 알아채주었고, 이나는 나영의 용량만큼 알아서 채워주었다. 나영도 이나에게 시시콜콜한 고민을 이야기했지만 그건 언제나 만한 것이었다. 그다지 놀랍지 않을 만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또래의 고민은 이나에게 오히려 표준의 삶을 제시해 주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가난했다. 적당히 꾸미고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면 부러워할만했다. 그러나 예비 사회인이라 불릴 만큼 어른의 영역으로 들어선 대학생들의 욕망이란 끝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만으로는 가난을 판단할 수 없었다. 이나는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했. 신입생 중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선정된 사람은 이나뿐이었기에 몇몇 동기들 사이에선 조교선생님이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말들도 나왔다. 이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충실하게 자리를 지켰다.


"소득 분위가 낮아서 선정된 거." 이나가 우습다는 듯 말했다. "그런 사정은 너랑 조교선생님만 알 걸."


옷가게에서 일하는 언니 덕분에 이나는 옷을 잘 입고 다녔다. 이나의 언니는 자신보다 키가 크고 날씬한 동생을 마네킹 삼아 코디하는 게 취미인 듯했다. 나이차이가 있는 이나의 언니는 실업계를 나와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나가 걸치는 옷들은 같은 보세 옷이라도 질이 달라 보였고, 가방이나 신발, 액세서리 등은 명품까진 아니더라도 이미테이션이나 중저가 브랜드에 속했다. 신입생이라 한창 꾸미는 것에 관심이 있던 나영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자주 들어왔다.


돈을 버는 족족 옷가지를 사모으던 언니를 두고 엄마는 일찍 취직했으면서 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사치와 낭비벽이 심하다며 비난했지만 이나가 보기엔 꾸미길 좋아하는 평범한 이십 대 아가씨일 뿐이었다. 언니가 있어서 이나는 평범한 척을 할 수 있었다.


"이 옷 예쁘다. 어디서 산 거야?"

"아, 이거 언니 거야." 이나는 오직 나영에게만 이렇게 대답했다. 그 외에는 특유의 엷은 미소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고마워. 인터넷에서 샀는데 어디 쇼핑몰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영은 이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영은 그것이 싫지 않았고, 이나는 적당히 모른척해주는 나영이 좋았다. 그런데 나영은 몇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모른척해준 게 아니라 진짜 몰랐던 거라고. 고등학생 때 이나를 몰랐던 것처럼, 대학생이 되어 알게 된 이나에 대해서도 사실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고.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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