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은 직접 알아보라는 나영의 냉소를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나영의 조언대로 이나를 직접 경험해 보기로 했다. 오래전 호감을 가졌던 나영을 알아본 이상 다른 사람을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잠시 사라져 준 덕분에 나영과 대화할 수 있었던 건 큰 수확이었다.
고맙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소개팅 자리인 만큼 상대방이 만약 내게 이성적인 관심을 보인다면 그렇게라도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헛물켜지 않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차라리 예의라고. 적당히 매너를 지키면서 식사만 해야지, 벌써 거절할 생각에 목이 타들어가는지 영훈은 김칫국 대신 물 잔을 들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우영훈 씨 맞죠?"
차분한 중저음의 여자 목소리가 영훈을 돌려세웠다. 카페에서와는 달리 영훈은 입구를 등진 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등 뒤에서부터 나타난 여자는 두 시간 전에 봤던 그 여자였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군, 영훈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여자는 자신을 윤이나라고 소개했다.
"볼 일은 잘 보고 오셨어요?"
이나가 맞은편 자리로 이동하는 동안 영훈이 물었다. 볼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묻지 않을 계획이었다.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그게 무엇이든 선약을 그런 식으로 파투 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십 미터도 되지 않을 거리였다. 카페 입구까지 들어온 이상 잠시라도 얼굴을 보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고, 영훈은 다시 한번 조금 전의 상황을 곱씹어보았다.
"아, 네. 덕분에요. 아까는 정말 실례했어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영훈의 눈높이에 맞춰서 앉으려다 말고 이나는 일어선 채로 목례를 하며 말했다. 영훈이 홀로 마주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공손한 태도였다. 일전의 행동을 수습하고 이미지 관리를 하려는 모양이지, 영훈의 시선은 비스듬했다. 만약 이 모습이 진짜라면 약속을 미룬 것에 대해 어떤 핑계를 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영훈은 첫 만남부터 의뭉스러운 이나의 어떤 구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한 일의 경중은 따져보고 싶지 않았지만 아까 그 행동에 대해선 해석이 필요했다. 사람을 보고 뒤돌아서는 일, 순간적으로 취한 그 행동은 본능적인 거부의 반응이었다. 소개팅 특성상 외모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영훈이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구십구 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래놓고 곧바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이 영훈은 영 꺼림칙했다.
"그런데 아까 카페에서 저랑 눈 마주쳤죠? 그러고 나서 바로 나가시길래 저 1초 만에 차였나 했어요. 하하."
영훈이 부러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이미 차인 기분이었지만 시원하게 차인 것도 아니라 찜찜했다. 핑계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왕 시작한 거짓말을 어떻게 수습하려는지 지켜보려는 의도로 던진 돌직구였다. 나를 봤다면 본 대로, 못 봤다면 못 본 대로 그럴듯한 해명이 필요할 거라고 영훈은 생각했다.
"저를 보셨어요?"
영훈의 질문에 이나는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할 말을 찾느라 큰 눈을 두어 번 깜박이는 동안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를 못 보셨다고요?" 흔들리는 눈동자를 고정하려는 듯 영훈이 되물었다.
"......"
대놓고 물어보면 당황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아니라는 대답은 영훈에게도 의외였다. 이나로서는 오늘 처음 본 남자의 투정이 생소했다. 어디서부터 변명 같은 해명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동안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아, 영훈 씨가 거기 계신 줄도 몰랐어요. 제가 딱 맞게 도착해서 미리 와 계실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경황이 없어서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찾아볼 생각도 못했어요."
이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하다가 멈추고 돌연 낮게 탄식했다. "아..." 입을 다물고선 잠시 멍한 표정으로 영훈을 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반복해서 끄덕였다.
"저를 먼저 보셨다면...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구나, 이나는 시선을 떨구며 연극 무대 위의 꺼져가는 조명처럼 작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나의 해명에도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은 영훈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눈이 마주친 건 찰나였다. 경황이 없을 겨를이 없었는데, 핸드폰을 보기도 전에 뒷걸음질 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영훈이 되묻기도 전에 이나가 별안간 불안한 눈빛을 던지며 성긴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요?"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