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간의 어딘가
아버지의 환갑을 기념하며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나, 신랑, 어머니, 아버지 가족여행으로 다니고 오스틴에서 4주간 같이 지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시는 일정으로 최근 한달 넘게 바쁘게 지냈다.
30년 넘게 다니셨던 회사를 은퇴하시고 인생 제 2막을 올리는 길에 응원을 해드리고 싶었다. 한국외에 다른 곳에서 재충전을 하시라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려 애썼던 시간이었다.
어렸을때의 아버지는 권위있으시고 늘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셨다. 앞으로 5년 후, 10년 후를 어떻게 보낼지 빅픽쳐를 그리라 장려해주셨다. 공부에 또 견문을 넓히는 여행을 간다고 하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시지 않는 든든하고 멋진 아버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해외에 나와 살게 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닦쳐서 직접 부딪치고 해야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사회에서 실전으로 배우는게 더 많아진 것이다. 변화가 빠른 요즘 세상에서 그 최첨단기술에 반걸음 늦게라도 따라가기에 벅찬 오늘날, 20년전 초딩인 나에게 했었던 레퍼토리를 30대인 나에게 아직도 하고 계신 아버지와 하루종일 붙어다닌다는건 참 힘들다.
매일 새로운 것들이 계속 생기는데 공부는 않고 옛날얘기만 하시는 꼰대 아저씨. 아니 허세부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한 아버지의 모습을 받아들이는게 서글프고 화가 났다. 그런 모습을 포용하고 가족으로 품어서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시기가 왔는데... 그 마음먹기가 너무 안된다.
요즘에는 남편들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 같이 저녁을 준비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해주기도 한다는 우리 모습에,
나 때는 안 그랬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이 변했고 이제 아빠 은퇴도 하셨으니 변하셔야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셨나보다. 30년 넘는 결혼생활동안 부엌에 들어오시면 큰일나는 아버지 삶의 철학에 언제까지 어머니가 참으실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집간 딸은 이제 같은 여자입장으로 아빠를 남편으로 한명의 남자로 평가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30년 전에는 용납되었던 관습이 이 시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동년배의 유시민씨처럼 박학다식하고 모든 현상을 분석하고 강의를 하는 모습은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20년간 들어왔던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계발을 해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그만 하셨음 좋겠는데.... 이제는 나뿐만이 아닌 신랑에게도 계속 하신다. 허세를 부리고 싶으시다면 내가 모르는 새로운 내용의 무언가를 말씀해주셨으면 더할나위 없을텐데...
같이 지낸 기간동안 딸내미 옆에서 계속 잔소리를 듣는게 서러우셨던 모양이다.
"얼른 집에 가야지 안 되겠네."
내 그릇이 작아지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충분히 포용하기엔 아직 크지 않은거 같다. 좀 더 성숙해져서 다음번에는 더 너그러운 내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