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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빛 Sep 22. 2019

내 아이가 구두닦이라 할지라도

어느 자리에서든 만족할 수 있는 삶

글감: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1926-2009)'의 사진을 보고 글을 쓰시오.


이 두 아이가 보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이 두 아이가 앉아있는 위치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종 때문일까? 소득 때문일까? 그냥 어떠한 이유도 없는데 내 시선 때문인 걸까?

 사진을 보고 조금이라도 먹먹해졌다면 계층이동이 불가능해진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녀를 키우는 것이 매우 어렵고 자녀를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은 백 번, 천 번 이해한다. 나도 내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할 것이니까.

 하지만 그 일들을 스스로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모의 경제력만으로도 부모의 인맥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부정 아닌 부정으로 더 쉽게 기회를 얻는다면 과연 이 사회를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그런 부모를 두지 않은 자녀들 그리고 그 부모 당사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믿지 못하는 사회는 서로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성공사례를 들으며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의심하도록 만든다.

 부모로서 아이를 좋은 자리에 올려놓기 전에 반드시 사진 속 저 어느 자리에 앉아있든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 여부에 상관없이 아이들이 이번 생을 틀렸다고 외치는 사회가, 헬조선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시대가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다. 입시비리라고 언론에 스캔들을 만들고 난 후 그들의 정신세계가 온전할지가 의문이다.

 스카이를 나와도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아이들은 더 위를 가리키는 부모, 사회의 손가락에 지쳤을지 모른다. 성과를 내야만 우리가 이 사회의 구성원일까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최고 등수는 항상 2등, 3등이었다. 아니 그 이하였던 적이 더 많았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 반 1등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성적이 오르면 전교 1등이 우리 반이었다. 공부 외에 달리기도 글쓰기도 그 무엇도 1등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때마다 우리 아빠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등이 가지는 심리적 중압감이 얼마나 쎈지 아니? 1등은 하지 마라."

 그 말 덕분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1등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1등을 하지 않아도 최상위 클래스가 아니어도 이 자리에서 설 수 있는 힘이 있다. 내가 노력해서 열심히 살아서 얻은 자리기에 나는 이 자리가 만족스럽다. 우리 세 자매가 하는 일을 세상에서 어떻게 볼 지는 모르지만 우린 스스로 만족하면서 산다.

 자식을 사랑해서 그 자리에 놓는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기에 어느 곳이든지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부모, 어떤 부모가 더 현명할까? 선택은 자유지만 그리고 내가 아직 삶은 모르지만 고민이 들 때는 가끔은 아이의 말과 표정이라도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숙제했어? 오늘 학원 갔니? 밥은 먹었니?  성적표 나왔니?" 이런 말은 대회가 아니다. 체크리스트일 뿐이다. 격려하고 따뜻한 대화가 이뤄지는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만약 내 아이가 저기 저 구두닦이일지라도 나는 거기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아이가 행복하다면 나는 그 길에서 함께 손뼉 쳐주고 싶다. 모두가 1등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에, 금수저가 아닌 엄마에게 온 내 사랑하는 아이에게 내 부모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해주고 싶다.


 남들이 바보같이 볼 지라도...


  이 글은 공대생의 심야서재 108일 글쓰기에 참여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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