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한국의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인도의 전통 복장인 사리를 사서 입고 저녁에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바라나시 골목으로 돌진! 땅거미가 질 무렵부터 까만 밤 수많은 작은 상점들의 불빛이 별처럼 가득 찰 때까지 사리를 사기 위해 인도의 복잡한 시장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얼마 후 이 세상에 있는 색이란 색은 다 있는 것 같은 사리 가게를 발견했다. 세상에! 내 느낌에 수천 개나 되는 듯한 사리들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한단 말인가? 시간이 없다. 우리 일행은 여자가 여섯, 그중에서 가장 예쁜 사리를 선점하려면 눈 깜빡할 새도 없었다.
저쪽에서 누군가 황홀한 색의 사리를 골라서 몸에 대 보는 순간, 그건 1위다. 난 2위라도 골라야 했다. 미친 듯이 바닥에 엉클어져 쌓여 있는 옷감들을 뒤집어 까면서 나는 근래에 느끼지 못했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이건 마치 경주마가 옆의 말을 지나쳐 앞지르는 그 순간인 것 같았다. 아마 그때 눈이 좀 뒤집혔는지도 모르겠다.
아, 붉은 계열은 1위가 골랐으니, 난 대조적인 색, 비취색을 집어 들었다. 비교적 단조로운 금박이 잔잔히 둘러져 있는 사리를 들고 거울에 비춰보고는 ‘그래, 이 색이야.’ 결정했다.
선택지가 너무 많을 때는 단순하게 가야 한다. 고민에 고민을 더해 봤자 점점 어리석은 선택을 할 확률이 크다. 신기록이다. 몇 초? 아니 몇 분 만에 다른 나라의 전통 의상을 고르다니!
누구는 빨강, 누구는 노랑, 누구는 주황. 그렇게 다들 각자의 사리를 샀다. 가게를 나올 때는 다들 얼굴들이 술 마신 사람들처럼 벌게져 있었다. 사리의 가격은 만 원이 채 안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안에 받쳐 입을 ‘촐리’라는 상의를 사고, 사리에 어울리는 큰 귀걸이도 하나씩 샀다.
그날 저녁, 우리의 사리 대 환장 파티는 넓은 홀에서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대는 걸로 정신이 없었다. 가게에서 배웠던 사리 입는 법은 어설프기 짝이 없어서 흘러내리고 뒤집어지고 난리였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다 못해 같은 호텔에 묵었던 인도 의사가 사리 입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우리는 다 두 팔을 벌리며 그에게 해 보라고 맡겼다. 그는 조심스럽게 허리에 손을 대도 되는지 물었고, 우리는 일제히 “오케이!”를 부르짖었다. 그날 밤 우리들만의 파티는 황홀한 색색의 사리들로 어둠을 환히 채웠다.
그리고 오르차에 갔을 때다. 더없이 좋은 햇살 아래 호텔 야외 회랑에서 작은 드로잉 전시를 했다. 주제는 드로잉 작가들과 함께하는 드로잉 여행이었다. 여행하며 그곳의 느낌을 간단하게 그리며 다녔다. 그림을 잘 못 그리는 내가 이 여행에서 얻은 것이라면 ‘그냥 나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 된다’는 것이었다.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건 상관없었다. 즐기는 데는.
호텔에는 전날 결혼식 전야 파티의 주인공들과 하객들이 머물렀고 다른 손님은 거의 없었다. 드로잉 전시에 그들 중 몇몇 여인들과 아이들을 초대했다. 아, 참 정 많은 인도 사람들! 열심히 보더니 작가와 대화하고 싶다며 그림에 대해 한참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그날 저녁에 결혼식이 있으니 와서 같이 즐기고 음식도 먹으라며 초대해 주었다.
야호! 사리를 다시 입을 기회만 노렸는데 정말 딱 맞는 순간이 아닌가! 단 이번에는 서로 바꿔 입어보기로 했다. 우리는 사리를 입고 양쪽 눈썹 사이 이마에 붉은 점을 찍거나 물방울 모양의 보석을 붙였다. 그것은 빈디(Bindi)라고 부르는데 힌두 전통에서 ‘차크라’라는 생명의 기운이 모이는 곳에 찍는다고 했다. ‘직관의 눈’이라 불리며 에너지를 저장하고 불행으로부터 지켜준다고 했다.
저녁 9시 즈음 우리가 정원에 들어섰을 때는 화려한 인도의 전통 결혼식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인사하고 춤을 추고 손을 잡았다. 참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진심을 다해 축하하며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런데 만나는 인도의 여자들이 어설픈 우리의 사리를 친절하게 고쳐 입혀 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그룹에 가면 거기서 사리를 이렇게 입어보라며 다시 고쳐 입혀 주곤 하였다. 혼란! 도대체 사리는 어떻게 입는 것이란 말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 지역마다 달라서 사리 입는 방법이 80가지도 넘는다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사리는 옷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4~5미터나 되는 긴 직사각형의 스카프 같은 천이었으니. 그것을 허리에 몇 번이고 감아서 등 뒤로 돌려 어깨에 걸치는 것이었다. 거기선 앞부분의 주름을 아름답게 늘어뜨려 잡는 것이 포인트였다. 사리를 머리에 쓰는 것은 전통 방식이라고 했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화사하고 빛나는 긴 사리 천에 휘감기어 인도의 여인이 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어느 가족을 만나 한 명씩 인사를 나누던 때였다. 그 댁 할머니가 내게로 와서 두 손을 잡고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천천히 나에게 첫 물음을 던졌다.
“Are you happy?”
나는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Yes, I am happy!”
그 할머니는 미소를 띠며 나를 가만히 품에 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도 그분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