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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Sep 27. 2020

퇴사 당일, 큰 결정을 내렸습니다

회사에 보내지 못한 부검 메일을 작성하다

넷플릭스에서는 회사를 떠날 때 부검 메일을 작성해 전사 직원에게 발송하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이 회사에 대한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발전을 위해 업무를 되새기며 5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번 여름, 나는 회사에 퇴사를 통보했다. 통보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나도 넷플릭스의 부검 메일의 양식에 맞추어 생각을 정리했다. 정리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막상 적어보니 대부분의 이유들이 합당해 보였다.


1. 왜 떠나는지

1) 잦은 실패 경험에서 기인한 구성원들의 업무적 자신감 하락

면접을 볼 때 우리는 아직 IP만 가지고 있지 갖추어진 일이 없다고 해서 다양한 업무를 진행해보고 싶었다. 공동구매, 할인쿠폰을 통한 구매 프로모션, 라이브 커머스, 상품 판매를 위한 전략적 브랜드 콘텐츠 구성 등 많은 업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 단계에서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고, 타사의 진행 레퍼런스를 공유하면 우리가 진행할 수 없는 이유가 나왔다. 사람들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샐리는 굿즈 판매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지만 막상 나는 IP를 담은 PB 브랜드를 론칭하는 일 같은 것에 열광하고 있었다. 함께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구조가 도저히 만들어지질 않았다.


2) 건강한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리더십 부재

상은 주지만 벌은 주지 않는 회사 분위기 덕에 '업무가 잘 진행된다'라는 말은 곧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와 같이 여겨졌다. 잘못한 직원은 경위서를 써야 하는데 그 잘못을 해결해주는 이가 있다 보니 그 잘못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상한 셀레브레이션이 진행되며 업무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졌다. 동일한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하는데 배움이 없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3) 애매한 팀 통합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업무 진행

어쩌다 보니 3개월에 한 번씩 팀이 개편되었다. 그때마다 조직장의 변경도 있었고, 구성원들의 핵심 업무에도 변화가 있었다.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데 1년간 진행했던 내 핵심 업무 중 하나가 프로세스 개선, 프로세스 정립인 것을 보며 참 속상했다. 프로세스를 정리해 설득을 하고, 한 두 차례 시행하면 변화가 생겼다. 변화의 과정에서 협업 부서와 의견 다툼이 생길 때면 강도 높은 험담이 오고 가며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부분이 불편했다.


 4) 에너지가 맞지 않는 동료들

지난 직장에서 새벽 4시까지 업무를 하더라도 '아 내가 내 이름 걸고 하는 일인데 잘해야지'하는 생각으로 업무를 하였다 보니 업무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이 자연스레 생겼다. 그 과정에서 성공 경험을 함께 나누기 위해 함께 업무를 하며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 같은데 이번 조직에서는 그런 치열함을 펼칠 수 없었다. 이직을 하며 스타트업 특유의 으쌰 으쌰를 꿈꿨지만 혼자 으쌰 으쌰 하며 분위기를 만들기엔 나 또한 숫기가 없었다.


5) 점점 좁아지는 업무 범위

처음 이 회사에 매력을 느꼈던 건 수많은 IP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마케팅 조직이 아닌 IP 사업부에 몸을 담으며 출판, 행사, 게임, 이모티콘, 굿즈 등 2차 저작물을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마케팅하고자 하였는데 점점 단일 굿즈를 판매하는 업무로 범위가 좁아졌다. 차라리 커머스에 몸담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업무들을 해보고자 했는데 새로운 업무에 대해 모험심을 가지기엔 어려운 조직구조였다.


2. 회사에서 배운 것

1) 가변적인 IP의 상품을 짧고 굵고 멋지게 판매하는 법

실물 상품도 판매해본 적이 없었는데 IP가 담긴 실물 상품은 더 새로웠다. 처음에 왔을 때는 일반 상품을 판매하기보다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소비자는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구매했다. 그 내용은 일전에 브런치에 작성했던 '굿즈 사세요, 굿즈'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소비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Sell side 판매 전략의 불안함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는 상품을 많이 볼 수 있었다. IP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면 소비자보다는 제작자 마인드로 혹은 제조사 마인드로 업무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회사에서는 인한 판매량 부재를 마케팅에서 책임을 졌다. 상품이 제작된 후 소비자를 염두에 두고 판매전략을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겪었기에 상품 기획 단계에서 소비자가 상품을 받아봤을 때의 경험까지 설계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3) IP Holder로서의 업무 자세

IP 상품은 할인이나 기획전마저도 IP의 가치를 긴밀하게 염두에 두며 진행해야 했다. 특히 라이센싱을 진행할 때는 IP에 대한 이해도를 맞추기 위해  극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IP는 단기간에 어떤 형태가 셋업 되는 것이 아니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4) 상품 판매 시 마케팅 성과 측정 방법

굿즈 판매에 한정이 되어있긴 했지만 상품을 판매할 때 어떤 데이터를 확인해야 할지 깊게 고민할 수 있었다.  다양한 리포트와 레벨업 문서, 대시보드를 만들며 팬덤의 규모가 작을 때 상품을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지, 객단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데이터를 확인하면 될지 등을 알 수 있었다.


3. 회사에 아쉬운 점

1) 불완전한 팀 세팅 및 잦은 목표 변경

작은 이 팀에서 디렉터가 세 번 바뀌었다. 물론 팀도 바뀌었고 목표도 바뀌었다. 팀의 문화를 정립할 수 없었기에 업무적으로나 업무 외적으로나 온보딩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2) 목표에 대한 소통과 동기부여

목표는 파트장까지만 공유가 되고 팀원들에게 공유가 되지 않았다. 3개월 치 목표가 있지만 1달 반 정도 지나야 목표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나머지 1달 반 동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노라면 부담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4. 앞으로의 계획

1) 한 번 더 제대로 된 커머스를 경험할 수 있는 조직에 속하기

그동안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콘텐츠가 좋아서 콘텐츠 회사만 골라다니는 샐리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커머스 마케팅을 해보고 싶었으나 커머스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아닌 현재의 회사에 몸담게 된 이유도 '콘텐츠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이젠 이 허울에서 벗어나 정말 커머스를 잘하는 기업에 합류하고자 했다.


2) 웹/앱 플랫폼 마케터로서의 커리어 회복

그동안 플랫폼을 가진 서비스에 몸을 담고 있었던 터라 플랫폼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마케팅에 있어 최고의 자유도를 가질 수 있는 때는 자사 플랫폼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직에 와서는 타사 플랫폼에 기대어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보니 업무가 제휴 마케팅의 영역으로 흘러갔다. 이런 부분을 배제하고 데이터를 더 면밀히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에서 업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브랜드 마케팅에 집중

그동안 콘텐츠 마케팅, 브랜드 마케팅에 집중된 업무를 하다가 커머스 마케팅을 몸소 경험해보니 정말 해야 하는 업무가 180도 달랐다. 상품에 대한 매력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전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어떻게든 스토리를 담으려 노력했지만 스토리를 담아 판매를 이끌어낸 것보다 하나라도 더 판매하는 것이 중요했다. 작금의 배움을 바탕으로 브랜드 메시지를 기획할 때 실제 판매까지 고려하여 업무를 진행하면 보다 좋은 마케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내용을 마음에 담고 퇴사 통보를 한 뒤 한 달 여 시간 동안 다양한 조직장들과 수차례 면담을 하였다. 조직적인 부분에 대한 염증은 앞으로의 개선을 위해 최대한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래서일까 퇴사 당일까지도 면담을 하게 되었고 나는 결국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1. 왜 떠나지 못했는지

1) 커머스 마케팅을 포함한 business development 업무까지 확장 가능한 역할 부여

단순히 유입을 이끌어내고 구매까지 가는 경로를 설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폭넓게 고민할 수 있도록 팀을 세팅할 수 있게 되었다. 업무를 진행해보니 사업개발의 영역도 함께 진행할 수 있어야 폭넓은 업무 진행이 가능했다. 지금은 마케팅이 스태프 조직으로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 또는 사업을 리딩 할 수 있는 역할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2) IP를 필요로 하는 브랜드와의 제휴 및 마케팅 진행

지금까지는 B2C를 위해 업무를 진행했다면 이제는 B2B 업무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솔루션이 필요한 브랜드에 컨설팅을 통해 인플루언서와 커머스가 결합된 판매 전략을 제안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공동구매 등의 판매 형태도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3) 조직장 및 C레벨과의 대화를 통한 회사 이해도 증대

퇴사를 통보하고 나서부터 퇴사 당일까지 면담을 수십 차례 진행했다. 회사에서 진행 중인 일들과 비전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 회사에서 배울 것

1) 사업개발 마케터로서의 역량 강화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나름대로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 커머스 플랫폼과 회사가 함께 윈윈 할 수 있는 구조

지난 초여름, 커머스팀은 독자적인 커머스 플랫폼을 론칭했고 그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매출 신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직은 출발선에 있는 플랫폼을 키우며 브랜드사와의 재미있는 협업 건을 만들게 되면 플랫폼의 브랜딩도 일부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결국은 브랜드사와 협업을 통해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양사 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구조를 기획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3. 앞으로의 계획

퇴사를 준비하며 가장 강렬하게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을 설득하느라 아직 못해본 게 많은데 이 회사에서만 할 수 있는 업무를 경험해보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이번엔 그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도록 노력해보려 한다. 전보다는 조금 더 조직에 대한 이해도도 회사의 방향에 대한 이해도도 깊어졌기에 한 층 더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고 싶다.


퇴사 당일 오전, 긴 면담을 마치고 점심에 팀원들이 열어준 퇴사 파티에 케이크 불을 붙일 때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책임감과 부담감이 한 번에 몰려왔다. 롤링페이퍼와 선물을 받고 피자를 먹으며 "여러분 제가 퇴사를 하지 않게 되었어요"를 이야기하였을 때 "개꿀잼 몰카죠?"라고 받아쳐준 팀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내본다.


모쪼록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다. 요란했던 여름이 가고, 더 요란한 1년이 다가오고 있다. 대 코로나 시국이라고 하는데 너무 과한 호사를 누렸다. 이번의 나는 모두가 입 모아 이야기하는 시니어 리티를 꼭 발휘하고 말 테다. 모험심과 부채감을 가득 안고 앞으로의 샐리를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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