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 응급실행
지난달부터 엄마가 통화를 하거나 만날 적마다 아버지 때문에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의례 매번 듣는 레퍼토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는구나.. 엄마는 아직도 변화를 바라고 기대할 것이 남아있는 건가.
상황에 따라 속이 터질 수밖에 없겠지만, 엄마는 늘 그렇게 우리에게 쏟아낼 때가 있으니 그러려니 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병원에 안 가려고 한다고, 근육통이라고 우기는데 답답해 죽겠다는 말을 가볍게 들었다.
항암 40차례를 하고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때마다 병원에서 2박 3일을 보내야 했던 엄마도 많이 지쳐서 항암을 쉬고 있었다.
발병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암세포가 크게 커지거나 수치적으로도 크게 나쁘지 않아서 6개월 동안 항암을 쉬었다가
아버지는 다시 항암을 하기가 부담스러워 이어서 3개월을 쉬었다.
그리고 9월 12일은 CT검사 예약일이었다.
9월 1일부터 아버지가 걷기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 주말에 언니와 찾아가 병원에 가자고 설득을 했다.
다니시던 병원의 의사에게 맘이 상했고, 그 병원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럼 근처병원 가서 다리만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지만, 완고한 아버지를 억지로 차에 태워 병원을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재차 당부를 하고, 더 아프면 꼭 병원 가야 된다, 병원 가는 건 도와줄 테니 꼭 연락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 일주일이 지났다.
한바탕 친정에서 난리가 났다.
열이 시작된 지 3일 째라고 했다. 해열제를 먹고 버티시다가, 약을 먹고 나면 속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다시 열이 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비 오듯 땀이 쏟아진 이유는 종류가 다른 해열제를 단시간에 이어 복용해서 온 부작용 같았다.
아이를 키우는 나는 해열제 교차복용은 4시간 정도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엄마는 그런 시간차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아버지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무식한 고집불통을 부리고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 일주일 전 얼굴과는 영 딴판의 몰골이 된 아버지를 보니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스인지 복수가 찬 것인지, 마른 몸에 배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고, 다리는 아예 걸을 수 없이 아픈 상태였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한바탕 고성과 욕설, 언쟁, 눈물바람이 지나가고 아버지는 근처 병원 응급실에 가는 것에 동의를 했다.
9월 15일, 다음 날 월차를 내고 남편과 나는 아침 일찍 친정으로 가서, 119 구급대에 전화를 걸었다.
다니시던 병원에는 죽어도 안 가겠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암환자이기 때문에 증상으로 응급실에서 받아줄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구급차 뒤에서 50분을 대기했다. 그 시간 동안 그냥 다니던 대학병원에 가자고, 억지로 가자고 하고 싶은데 엄마도 원하시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성질을 부려서라도 그렇게 끌고 갔어야 하지 않았나.. 후회의 찌꺼기가 남아있다.
지난주 CT검사 예약된 날이라도 억지로 병원에 모시고 갔더라면..
왜 그렇게 하지 못했던가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왜? 아버지와 싸우면 엄마를 괴롭게 하니까? 엄마를 괴롭게 하면 또 화가 나니까? 늘 그렇게 살아왔듯 아버지는 고집불통 폭군. 아버지는 그렇게 생겨먹었고 변하지 않으니까. 절대.
성인이 되어서 차라리 아버지 없는 편이 더 나았겠다고, 아버지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엄마가 이혼을 안 하신 건 우리 때문이라지만 나는 엄마가 빨리 돌아가셔서 아버지에게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10대를 보냈고,
그런 엄마의 속을 썩이지 않고 도우려고 애쓰며 살아온 딸이니까.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면 부모의 희생과 아픔이 이해가 되어 고마움과 미안함에 눈물짓게 된다는데
나는 오히려 어떻게 우리에게 그럴 수 있었는지 분노하며 깨닫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이면 부모님과 좀 더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야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 어쩔 수 없었던 그들의 처지와 행동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를 덜 사랑했기 때문에 더 나서지도, 더 우기지도, 싸우기를 자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가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 방식대로 했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아버지 옆에는 엄마가 계시니까 엄마를 더 괴롭게 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핑계를 댔다.
긴 대기 시간을 지나 근처의 2급 병원 응급실에 들어갔고, 응급처치와 각종 검사를 받은 결과.
직장 쪽 암세포가 커져서 항문을 막아서 배출이 변이 제대로 되지 않아, 대장이 부풀어져 늘어나 있고 변이 잔류상태로 있으며 염증수치가 높고 패혈증 쇼크상태.
CT상으로는 항문으로 변이 배출이 안되니까 다리 근육 쪽에 길이 만들어져 변이나 독소가 내려가서 다리에 염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
폐에 전이된 암세포가 (발병 시에는 정말 작은 점 하나였는데 3년 후인 현재) 다발성으로 퍼져있다고 했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기도 하고 이 정도 전이와 정황을 볼 때 다른 신체조직에도 전이되었을 것 같으니 다니던 병원으로 전원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그 발열오한으로 떨고 있는 와중에도 그 병원에 안 갈 거라고 말을 하는 이 사람. 정신은 너무 멀쩡하다.
우선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기로 했다. 심폐소생술 등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엄마가 사인을 했다. 그때만 해도 그 정도 결정을 하는 것도 울컥 눈물이 났었는데..
큰언니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외국에 있는 둘째 언니에게도 연락을 하고, 이제는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중환자실에 올라가기 전, 옷을 갈아입히는 데 환자가 무거워 간호사와 엄마, 남편과 나까지 합세를 했다.
변이 흘러 시트를 갈고, 닦이고 기저귀를 채우는 과정에서 정말 무력한 인간의 몸을 보았다.
그것이 내 아버지의 몸이라는 것이, 아버지가 이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묵직한 진동으로 이어졌다.
눈물이 안 날 줄 알았는데, 수시로 터져 나올까 꾹꾹 누르면서
큰언니와 동생을 만나 상황설명을 하고,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을 의논했다.
전날의 한바탕에 마음이 너무나 상한 큰언니는 극한 스트레스 상태로 힘겨워했다.
가족들이.. 또 아프고, 다쳤다.
가족들의 소용돌이 중앙에 선 기분이 들었다.
의도하지 않게 모든 정보의 중간 전달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이 연결고리 속의 고리가 된 것 같다.
많은 말을 해서 목이 쉬려고 했다.
흐를 듯 말 듯 출렁이는 마음.
한 번씩 이런 일들을 겪고 나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분노와 싸우며 무너진 일상 속에서 허덕였었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회복할 시간이.
아버지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