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 만이 용서할 수 있다
'강한 자 만이 용서할 수 있다'
아들이 7살 때 태권도 학원에 보낸 적이 있다. 학원 차량이 아이를 태워 오고 가고 했는데, 이 차의 외부 전체에 크게 쓰여 있던 문장이다.
나는 이 말이 왜 불편한지를 곱씹어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강한 자는 누구이며, 진정한 용서는 무엇인가?
정말 강해져야만 용서할 수 있는 가?등등
먼저 '강한 자'란 누구인가. 흔히 이 표현은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으로 우월한 힘을 지닌 특별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어떤 사람들은 상처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힘을 갖고 있고 그래서 용서마저도 쉽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누구도 상처 앞에서 완전히 담대할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 어떤 슬픔은 한 사람의 개인을 무너뜨리고, 또 어떤 배신은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그저 '강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약함과 회복의 긴 과정을 모욕하는 태도다.
용서는 힘의 과시도 도덕적 우월성의 증명도 아니다.
성경에서도 용서는 결코 강자의 특권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 구절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나 또한 용서받았음을 기억할 것! 여기서 용서는 내가 가진 어떤 증거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의 상처를 품는 행위이다.
'강한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 특히 불편한 이유는, 상처받은 이들을 약자로 규정하고 또 다른 의무감을 씌운다는 점이다.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더 미숙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끝내 용서를 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용서에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 평생 다다르지 않아도 괜찮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삶이 덜 가치 있거나, 덜 강인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이 상처에 붙들리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시작될지도.
그리고 그 결심은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깊이 다치고,
아직도 흔들리면서,
때로는 용서와 분노 사이를 수없이 오가면서,
어느 순간 스스로를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 '강한 자'라는 이름표는 필요 없다.
용서는 더 이상 과거에 갇히지 않으려는 나의 선택이기 때문에.
또한 용서는 약함과 강함 사이에서,
더는 미움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망설임과 다짐의 충돌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소중하다.
나는 믿는다.
진정한 용서는 약함 속에서도 시작될 수 있음을. 상처투성이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삶을 새롭게 선택하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래서 나는 '강한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은 과감히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