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오프를 지나며,
라스베가스로 이사 온 뒤, 내가 이전에 살아본 캘리포니아나 메릴랜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풍경 하나를 마주했다. 스트립을 벗어난 거리마다 아침 식사를 전문으로 하는 로컬 식당들이 즐비하다는 것.
The Cracked Egg, BabyStacks Cafe, Broken Yolk Cafe, Egg Works. 계란을 상징처럼 이름에 넣은 이 식당들은 대개 새벽같이 문을 열고 오후 두세 시면 영업을 마친다. 아침과 아점을 겸하는 이 아침 식당들은 관광객만을 위한 것도, 완전히 로컬만의 것도 아니다. 또 라스베가스는 그 자체로 관광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랜드서클 등 여러 미국 국립공원들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쉬고 가는 중간 도시이다. 그랜드서클로 향하는 길목에서 국립공원을 경유하는 이들도, 밤새 카지노에서 지친 이들도, 또 가족들과 따뜻한 아침을 원하는 이들도 이곳을 찾는다.
처음엔 이런 생각도 했다. 혹시 새벽에 도박으로 모든 걸 잃고 쓸쓸히 거리로 나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 한 접시라도 건네주기 위한 공간들일까? 하지만 이곳은 그런 단순한 설명을 넘는 묘한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
펜케이크, 해시브라운, 프렌치토스트, 스크램블 에그. 어쩌면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라는 건 그런 음식인지도 모른다. 실패의 밤이나 불안한 하루 앞에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온도를 되찾게 해주는 접시.
어린 시절, 엄마는 식빵도, 펜케이크도, 프렌치토스트도 직접 만들어 주셨다. 지금은 웃으며 “그때는 돈이 없어서 뭐든 직접 만들어야 했지”라고 말하지만, 내 기억 속 그 음식들은 엄마의 손 맛을 넘어서는 애정의 표현이었다. 따뜻하고, 폭신하고, 달콤했던 프렌치토스트 한 조각.
그래서 나에게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는 그저 식사 그 이상이다. 익숙함, 안정감, 그리고 잠시나마 위안이 되는 시간.
로컬 식당 중 Egg Works는 우리가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자주 찾는 곳이다. 천장에는 장난감 기차가 달릴 수 있는 레일이 설치돼 있고, 작은 기차는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레일 위를 오간다. 음식은 익숙하고, 내부는 어릴 적 집에서 가지고 놀던 기차를 담은 풍경을 닮았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는 날이면, 이곳 음식이 당기는지 모르겠다. 정신없던 주중을 보내고, 토요일 아침 Egg Works로 향했다. 늘 먹던 프렌치토스트와 무한리필 커피를 시켰다. 커피는 아예 보온병으로 나오는데, 김이 살짝 나는 커피를 따라 한 모음 마시면, 안갯속 같던 머리도 조금은 더 깨끗해지는 것 같다.
며칠 전, 회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레이오프가 있었다.
전체 인원의 25%가 회사를 떠나야 했다. 여섯 명이었던 우리 팀에서는 두 명이 해고되고, 또 다른 둘은 파트타임으로 전환되었다. 그전까지는 업무 성과 미달로 인한 이유 외에는 해고가 한 번도 없었던 터라, 갑작스러운 해고에 혼란스러웠다.
레이오프가 진행된 건 화요일 오전이었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주로 화요일에 미팅이 많이 있어서 오전부터 정신없이 미팅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회사 동료에게서 외부 메시지가 왔다. 동료는 파트타임 전환을 통보받았다고 했다.
그 동료는 나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고, 우리는 곧 기능을 프로덕션에 배포(개발된 기능이나 코드를 실제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운영 환경에 반영하여 서비스를 공식적으로 배포하는 것)할 예정이었다. 당장은 필요한 인력이니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잡아놓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회사가 사람을 자원처럼 다루는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씁쓸하다.
레이오프는 모두 일대일 온라인 미팅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매니저가 개인 메시지를 보내면, 그게 곧 내 차례라는 신호였다. 아직 오후가 남아 있는데,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내일도 여전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진작 이직했어야 했는데”였다. 너무 오래 남아있었더니 결국 이런 상황이 오는구나. 그 와중에도 스톡옵션(회사가 임직원에게 일정 기간 후 정해진 가격으로 자사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권리)이 생각났다. 회사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일단 내가 맡은 업무만이라도 문서로 정리해 두자고 마음먹었다.
상황을 인지하고 나니, 회사 내 분위기가 빠르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이오프 된 직원들이 일정에 잡아온 미팅들이 취소되고 사라졌다. 회사 메신저 내 계정들이 없어졌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지만 매니저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대신, 새벽에 전체 미팅이 잡혔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이번엔 내가 살아남은 건가.’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당장 회사에서 해고된 동료들이 안타깝다. 나는 물론 회사에 변화에 둔감한 편이지만, 레이오프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살아남은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묘한 죄책감. 그리고 '다음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다. 아마 내가 이번에 정리되지 않은 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자동화 프로젝트 덕분일 거다. 이 자동화가 완료되면, 그야말로 자동화이니까, 내 자리도 위태로워질 테다.
수요일 회사 전체 미팅에서는 레이오프의 배경이 설명되었다. 1분기 실적이 예상에 미치지 못했고, 투자 보드에서 인원 감축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미팅 후, 매니저와의 일대일 미팅도 있었다. 우리 팀은 이제 매니저를 포함해 단 네 명. 추가 감축이 생기면 기존 업무를 유지하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한 주를 복기하면서 먹는 토요일 아침은 쌉싸름하다. Egg Works의 식당은 이름처럼 거의 모든 음식에 계란이 들어간다. 계란 한 입, 프렌치토스트 한 입. 천천히 씹는다. 그 익숙한 맛이, 복잡한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혀 준다.
그런데도 문득, 이 평온한 식탁 위에서 프렌치토스트를 썰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짐을 싸고, 누군가는 일을 잃었고, 나는 여전히 음식을 앞에 두고 있었다.
레이오프 이후 지난 주 금요일까지 정상적으로 진행된 미팅은 거의 없었다.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상황이라 일을 진행하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영향을 받은 동료들에게는 혹시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지만, 크게 도움을 줄 만한 게 없어 씁쓸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커피를 천천히 들이켰다. 이 평범한 식사에서 나는 아주 작은 위안을 느낀다.
어딘가에서 나의 동료들도 이런 따뜻한 식사를 하고 있길. 그들도 괜찮은 주말을 보내고 있길. 빠르게 괜찮아 지길.
물론, 괜찮다는 말은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는다. 다음에 레이오프가 이어질 수 있고, 나도 그 리스트에 오를 수도 있다. 불안은 어쩌면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익숙한 음식으로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불안이 접시 위에 조금 남아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