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명이 잭팟인 딸
지난 몇 달째 브런치에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일들을 정신없이 처리하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있으면서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예상치 못한 임신’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이다 시간이 흘러버렸다.
라스베가스로 이사 온 지 1년도 안 돼 두 줄이 떴다. 임신 테스트기 얇은 막대 끝에 선명한 두 개의 선. 그 순간 떠오른 건 뜻밖에도 오렌지카운티에서 무리해 샀던 작은 타운홈이었다. 그때 우리의 가장 큰 ‘베팅’은 집이었다고 믿었다. 마음을 다 잡고 확률의 세계와 거리를 두고 살고 싶었는데, 삶은 다시 확률표를 펼쳐 보였다.
우리는 난임부부였다. 연애 시절에도 우리의 난임의 가능성을 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삶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우리답게 열심히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별다른 검진 없이 결혼했다.
결혼 3년 차, 아이가 생기지 않아 처음 난임병원을 찾았다. 첫 방문에 의사 선생님의 우리의 검사 결과를 보고 한숨을 쉬셨는데, 선생님의 한숨은 마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 마냥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두 분은 인공수정도 안 돼요. 시험관을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오늘 당장 정자 냉동부터 하세요.”
“몇 년 후 울면서 오셔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다짐도, ‘못 낳을 수 있다’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의사 선생님은 “애매한 나이에 애매하게 미루다 더 후회한다”는 다른 사례들을 들려줬지만, 그날 우리는 명확한 결정을 못 내렸고, 남편만 당일에 정자 냉동을 진행 하기로 했다.
휘몰아치는 병원 방문을 뒤로하고 우리는 근처 카페에 앉아,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우리의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어른들은 언제나 그 나이에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제 그 트랙에서 미끄러져 나온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정해진 트랙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생겨났던 것 같다. 우리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불완전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친정부모님은 시험관을 시도하라며 성화셨지만, 미국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택으로 일해도 대다수 미국 회사에는 지역 제한이 있다. 내가 원한다고 한국에 몇 달 머물며 시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시험관을 시도할 수 있지만, 금액이 어마어마하다. 보편적으로 시험관을 한번 도전하는데 3-4만 불 정도의 금액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렌지카운티에 작은 타운홈을 사느라 손에 쥔 돈을 다 써버린 우리는 매달 소중한 월급으로 모기지와 생활비를 쓰고 나면 저축을 하는 것도 빠듯했다.
나이는 더 먹어가고 마음은 갈팡질팡했지만, 끝내 방법을 찾지 않은 건 우리의 결정이었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평생 아이 없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자, 그때 살던 집이 짐처럼 느껴졌다. 처음 집을 살 때는 가족 친화적이고 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를 목표로 무리를 해서 오렌지카운티에 집을 장만했다. 하지만 목표가 바뀌었다. 우리는 부부와 고양이 ‘짜장’이 가족 구성원인 삶을 정비했다. 정성껏 고친 타운홈을 팔고, 주 소득세가 없는 라스베가스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사를 한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결혼 7년 만에 임신을 했다. 두 줄이 떠있는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더 정확하다는 테스트기를 몇 개나 더 사서 확인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역시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이렇게 다가오는구나.
솔직히 말하면, 임신이 될 거였다면 오렌지카운티를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오렌지카운티를 떠나지 않았다면 받았을 출산 혜택들, 이직을 더 서둘렀어야 했다는 후회, 스타트업이라 의무적 출산 휴가가 없다는 사실….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정신 차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며 걱정의 패턴을 멈추려 했다.
노산에 접어든 나이이니 병원 확인 전까지는 고민을 접자고 다짐했다. 미국에서 산부인과는 처음이라 보험 사이트에서 인네트워크(In-network: 보험사와 계약된 병원·의사·시설이라 본인 부담이 적다) 병원을 한참이나 뒤졌다. 임신 8주가 지나야 첫 진료를 잡아준다기에 테스트 후 3주를 더 기다려 초음파를 봤다.
병원에서는 임신 확인과 내가 노산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상기시켜 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Your age..."라는 말을 하도 많이 써서 아니 선생님 제가 노산이라는 말 말고는 해 주실 말씀이 없으신 건가요 싶었다.
8주 차엔 입덧이 심했다. 누워 있는 게 가장 나았지만 일은 해야 했다. 재미있는 건, 입덧이 심하던 날, “네 유모차 살 돈 벌어야 하니, 그만해”라고 실제로 말을 내뱉은 적이 있는데, 진짜 입덧은 그 뒤로 잠잠해졌다. 입덧 기운이 올 때는 천도복숭아로 극복했다.
노산이라 필수라는 여러 피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날, 저녁에 뜬금없이 하혈을 하기 시작했다. 피가 너무 많이 쏟아져 남편과 나는 유산을 직감했다. 밤이라 병원도 닫아 다음 날 급히 휴가를 내고 원래 등록한 산부인과에 갔지만 예약이 없으면 안 된다는 답. 하는 수 없이 얼전케어(Urgent Care: 생명 위협은 아니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한 질환을 예약 없이 진료)를 찾았다. 오랜 대기 끝에 들은 말은 “유산은 아니고 태아는 건강합니다. 원인은 모르겠습니다.”였다. 안도와 허탈이 뒤섞인 채 집에 돌아와 반나절을 이동·대기한 피로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 모든 소동을 지나 이제 임신 16주가 되었다. 남편과 국립공원을 섭렵해 보겠다며 운동으로 줄여놓은 체중은, 천도복숭아 ‘흡입’ 덕분에 도로아미타불. ‘설마’ 하는 마음에 16주까지는 시부모님께 알리지 못했고, 친정엔 입덧을 견디지 못해 먼저 말했다. 엄마는 10주 차쯤 와서 김장을 해주고 가셨다. 내가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보시곤 모자랄까 봐 종류별로 김치를 담가주고 한국으로 가셨다.
16주나 돼서야 나는 앞으로 더 많은 무수한 허들을 넘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하게 됐다. 초기에 남편과 우스갯 소리로 주고받은 말 중에, 아니 슬롯머신에서 잭팟을 기대했는데, 임신이 되었으니, 아이가 잭팟인가 보다 했다.
노산으로 병원에서 10주 차에 기형아 검사를 진행해 줬는데, 이미 그 검사 결과에서 딸이라고 알려줬는데, 딸임에도 태명은 잭팟으로 굳었다.
세상사는 늘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계산한 확률도 이렇게 무너지면서 더 배워가는 거겠지. 우리의 세상도 그렇게 조금씩 더 확장되어 가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고양이 짜장씨도 외동으로 평생을 즐기며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큰언니가 되는 경험을 앞두고 있다.
어렵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새로운 퀘스트가 끊임없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다. 회사에 출산 휴가 이야기를 꺼내는 일, 근무시간에 편의를 구해서 병원과 정밀 초음파를 다녀오는 일… 매일 작은 퀘스트를 하나씩 깨나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퀘스트의 끝, 진짜 ‘끝판왕’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도, 우리 함께 열심히 퀘스트를 깨 보자. 건강하게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