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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맞닿는 순간, 오스틴에서

끝이면 시작이었다

by Joyce

해가 저 너머로 떨어질 무렵, 아직은 빛의 온기가 남아 있지만 어둠도 서서히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이런 낮과 밤이 맞닿아 있는 순간, 오스틴의 한 다리(콩그레스 애비뉴 브리지 / Ann W. Richards Congress Avenue Bridge) 위아래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강물 위로는 아직까지 금빛의 노을이 남아 있고, 다리 밑에서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박쥐들이 수군수군거리는 듯한 미세한 진동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공기 속에 긴장감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할 즈음, 다리 틈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지듯 날아오른다. 바로 수십만 마리의 멕시코자유꼬리박쥐(Mexican Free-Tailed Bats)들이 대형을 이루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이다. 처음엔 한 줄기 연기처럼 보이던 그것이 점점 하늘을 가득 메우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장관이자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정말 장관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없는, 세상 신기한 풍경이었다. 이렇게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면, 기억 저편에 잊고 있던 감각들마저도 새로운 경험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날,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그 틈처럼, 인생도 끝과 다른 시작이 그렇게 스치듯 이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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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에 온 이유는 남편의 석사 졸업식 때문이었다. 그의 두 번째 석사 학위. 몇 년간 일을 병행하며 이어온 공부의 끝이었다. 졸업식 시즌이라 캠퍼스는 졸업 사진을 찍는 학생들과 축하차 방문한 가족들로 가득했다. 캠퍼스 주변을 걷다가 마주친 다양한 전공의 졸업생들. 그들이 내뿜는 젊음의 에너지 속에서 나 자신도 한동안 묻어두었던 호기심과 설렘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석사 졸업식은 실내 경기장에서 진행되어,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고생할 필요 없이 시원한 실내에서 편하게 앉아 졸업식을 축하할 수 있었다.


졸업생들이 하나씩 이름을 호명받는 장면을 바라보며, 남편이 걸어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단지 학위를 받는 의식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인내와 노력, 그리고 조용한 희망이 쌓여 만든 순간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남편은 끈기가 좋은 사람이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도 묵묵히 해낸다. 그의 고생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이 졸업식은 내게도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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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기하게도, 삶은 어떤 일을 마무리하고 끝내기보다는 또 다른 방향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경험이 더 많은 것 같다. 남편이 석사를 시작하던 시기는 우리가 미국 생활에 적응하던 초기 시기이기도 했다.

이번 졸업을 통해 남편도 마음에 여유를 얻었다. 앞으로의 저녁 시간은, 야근이 아니라면, 새롭게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차지하겠지만 공부에서 잠시 손을 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여유가 된다. 물론 졸업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안다.


그다음엔 남편이 좀 더 좋아하고, 좀 더 하고 싶은, 그의 꿈에 가까운 일이길 바란다. ‘끝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꾹 눌러, ‘이제부터야’라고 말하게 되는 그 마음. 오스틴의 박쥐 떼처럼, 다음 여정을 향해 날아오를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가 머무른 오스틴은 햇살이 가득한 도시였다. 콜로라도강은 도심을 가로지르며 푸르게 흐르고, 골목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스틴 다운타운에서 콜로라도강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곳곳에 작은 벤치들이 있어, 잠깐 앉아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기 좋았다. 습한 공기에 땀이 옹기종기 맺히지만, 오랜만에 펼친 책은 그것마저도 잊게 만들어준다. 습한 공기, 끈적한 이마의 땀방울, 그리고 문장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잊고 있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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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자, 퇴근 후엔 자연스레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몇 년간 “언젠가”라고 미뤄두었던 일들을 이제는 “지금”으로 옮기고 싶어졌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장 사이로 바람이 스며드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동안은 피곤함을 핑계로 책도 읽지 않았고, 운동도 멈췄다. 하지만 오스틴에서의 경험이 내 감각을 다시 깨워주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해도 돼.

몇 년 동안 멈춰두었던 운동도 다시 달리기로 시작했다. 예전만큼 달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오늘의 내가 되길 바라고 있다.


남편은 휴식기를 맞아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그의 글도 브런치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 중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겠지.

꼭 대단한 꿈이 아니더라도, 그 사이사이에 소소한 기쁨은 분명히 있다. 소소한 공부를 쌓아, 또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흐르는 땀, 이북 리더기로 책 한 장을 넘기는 시간, 그리고 엉성해도 끝까지 써보는 한 문단.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조금씩 다시 빚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은 멈추지 않는 여정이다.


졸업식이 끝난 저녁, 우리는 다시 콩그레스 애비뉴 브리지 위에 섰다. 낮의 기운은 저물고, 밤의 기운이 조용히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박쥐 떼가 다시 하늘을 메우며 날아오르고, 우리는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며.


시간은 흐르지만, 어떤 순간은 마음에 길게 머문다.

오스틴의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끝과 새로운 시작을 마주했고, 그 경계에서 함께 서 있었다.

그날의 박쥐 떼처럼, 우리는 또 다른 날갯짓을 준비 중이다.



*오스틴에서 박쥐떼 이동은 보통 해질 무렵에 시작되며, 많은 인파가 몰리기 때문에 여유 있게 미리 도착해 자리를 잡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다리 양쪽 어느 방향에서도 관람이 잘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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