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콰이어 국립공원,
어릴 적 나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특히 거대한 나무가 등장하는 이야기에는 유독 마음이 끌렸다. ‘반지의 제왕’ 속 엔트(Ent)처럼, 천천히 걷는 나무가 나를 호빗처럼 어깨에 태워 숲을 산책시켜 주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대의 시간 속을 여행하듯, 느리고 조용한 나무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그 상상은 내가 좋아하는 상상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나무는 세상에 없다고, 나무의 어깨에 기대어 숲을 올라갈 생각 말고 튼튼한 두 다리로 산을 넘어가야 한다고, 이런 상상력에 시간을 소비할게 아니라 체력을 쌓으라며 스스로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을 끊어냈었다. 학교 책상에 앉아 운동장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잡념을 떨쳐내고 어느 정도 일 인분을 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라나야 한다고.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친구들 사이에 어울리며 여기서 내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여기서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면 다른 그 어느 곳에도 내가 설 자리는 없다고 교육받고 생각하면 자랐다.
그렇게 나는 어릴 적 나만의 세계를 접고 현실에 집중했다. 그때 내가 간과했던 것은, 세상은 참 넓고, 어딘가에는 상상한 그것과 닮은 무엇이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미국에서 박사 생활을 하던 시기에 태어나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부모님은 공부를 잘하던 언니처럼 나도 명문학교에 진학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언제나 중상위권에서 맴돌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미국으로 다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선택은 가족에게는 쉽지 않은 제안이었다. 셋이나 되는 딸과 빠듯한 가계. 부모님은 조건을 내걸었다. 미국에 있는 가디언 이모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를 찾을 것, ESL 수업 없이 바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토플 점수를 받을 것,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낼 것.
나는 지원 에세이를 혼자 쓰고, 토플을 공부해 기준 점수를 넘겼다. 내 뒤에서 내가 전화 인터뷰를 진행하며, 조용히 내 영어를 듣고 있던 아버지는 그제야 "보내지 않을 수 없겠다"라고 결심했다고 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한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했다. 놀라웠던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이 맞는 친구, 진심을 다해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배회하던 나는 새로운 학교에 안착했다. 늘 방황하던 나는 처음으로 ‘나의 학교’에 스며들었고, 축구를 하고, 공부가 재미있었고, 성적도 눈에 띄게 올랐다.
내 고등학교는 시골에 있었고, 자연을 기반으로 한 아웃도어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학생들은 해마다 두 차례 캠핑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성적이 좋을수록 더 편안하고 인기 있는 캠핑(백패킹이 아닌 캠핑, 호수 인근 캠핑장에서 수상스포츠를 참여할 수 있는 캠핑)에 배정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입학 첫 해 나는 여자축구 코치이자 문학 선생님이 인솔하는 백패킹 캠프를 따라갔다.
열흘 간의 트레킹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학교 버스는 문학선생님과 철인삼종경기를 뛰던 화학선생님 그리고 나를 포함해 여학생 8명을 트레일 입구에 내려줬고, 우리는 열흘 동안 트레일을 이동하며 캠핑을 하고 마지막 날 끝지점에서 학교버스가 다시 우리를 태우러 왔다. 열 명의 여자들은 열흘 동안 신나게 떠들고 걸었다. 내 앞에서 걷던 한국 후배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백패킹 가방은 그녀의 머리 한참 위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신나는 발걸음을 갖고 있었는데, 뒤에서는 그녀의 통통 신난 발걸음을 따라가느라 힘든 줄을 몰랐다. 열흘 동안 씻지도 못하면서 냇가에서 발을 씻고, 파스타를 태워먹으며, 손전등을 끄면 완전히 어두워지는 숲 속에서 별을 보며 잠들었다.
세콰이어 국립공원(Sequoia National Park)도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가봤다. 캠핑을 다니던 어느 날, 캠핑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선생님께서 어디 한 곳에 들렀다가자며 멈춘 곳에 내 어릴 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나무들과 마주했다.
세콰이어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크기의 밑동,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나무.
쓰러진 나무 안에 들어가 손을 뻗어도 양쪽 끝에 닿을 수 없는 너비.
그 앞에 서자 문득 이런 상상이 떠올랐다. 어느 날 이 나무의 커다란 가지가 내 머리 위로 내려와, 조심스럽게 나를 들어 올려 어깨 위에 태우고 다시 숲을 걸어가 주는 상상. 혹시 이 거대한 나무들은 아주 오래전, 진짜로 대륙을 거닐던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이 자이언트 세콰이어(Sequoiadendron giganteum)는 수천 년 동안 평균 50~85m, 최고 95m까지 자라며, 밑동 둘레는 30m가 넘는다. 키로는 북쪽의 코스트 레드우드보다 높이는 낮을 수 있지만, 전체 부피로 따지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명체다. 그중에서도 셔먼 장군 나무(General Sherman Tree)는 부피 기준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무로 손꼽힌다.
이런 나무들이 모여 있는 세콰이어 국립공원(Sequoia National Park) 은 캘리포니아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위치해 있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세콰이어 숲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그날, 나는 그 숲에서 어릴 적 상상이 실현되는 것을 느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백패킹 장비를 학교에 다른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마치 꿈을 접고 현실로 돌아오는 것처럼.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하루 종일 코드를 바라보는 일상 속에서 상상은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세콰이어 나무도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다 얼마 전, 남편과 다시 세콰이어 국립공원을 찾았다. 그 순간,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움트기 시작했다. 현실만이 존재하던 내 머릿속에, 다시 상상력이 꼬리를 물고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거인 나무가 가득한 숲에서의 모험 스토리를 머릿속에서 상상하기 시작했다.
세콰이어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을 걸으며, 나는 다시 잊어버렸던 모험 이야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반지의 제왕의 거대한 나무들처럼, 세콰이어가 고요한 어깨를 내어주는 장면이 떠오르고, 어느 날 나무 하나가 갑자기 나지막이 말을 걸어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토록 현실에 갇혀 있던 머릿속에, 다시금 상상의 숲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세콰이어 국립공원 잊고 있던 상상력을 되찾게 해주는, 시간의 숲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 속에 배어 있는 수천 년의 나이테가, 그동안의 지켜봐 온 끝없는 여정을 알려주는 것 같다.
만약 현실을 버티느라 상상의 세계를 잠시 내려놓고 있었다면, 한 번쯤 세콰이어 숲 어딘가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 앞에 멈춰 서보기를.
그 나무들은 어쩌면 지금도, 아주 조용히 우리를 들어 올릴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세콰이어 국립공원은 차량으로 이동하기 좋지만, 도로는 대부분 일 차선이고 주차 공간이 매우 협소합니다. 특히 여름 성수기에는 아침 일찍 방문하는 것을 추천드려요. 대표 명소인 셔먼 장군 나무, 모로 록, 터널 로그는 도보로 가까우면서도 접근성이 좋아 꼭 들러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