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아끼는 한 가지 방법
최근에 보험문제로 출산 병원이 한 곳으로 좁혀지면서 해당 병원에 출산 관련 수업을 다녀왔다. 원래는 단순히 분만실 투어만 신청하고 싶었지만, 투어 프로그램은 이미 마감되어 있었다. 대신 출산 수업을 들으면 투어가 포함된다는 설명을 듣고,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이어지는 다섯 시간짜리 강좌를 신청했다. 커플당 40달러, 미국에서 첫 출산을 준비하는 입장에선 그리 비싼 비용은 아니었다.
혹시 미국에서 첫 출산을 앞두고 있다면 꼭 들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출산 수업은 실제 분만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진행했다. 그녀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의료기구를 하나씩 꺼내 보이며, 출산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기를 맞이한다는 건 감정의 문제뿐만 아니라, 기술과 준비의 문제’라는 말이 실감 났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침 9시 수업에 맞춰 우리는 8시 40분쯤 도착해서 안내받은 교실을 찾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안내해 준 입구를 찾아서 들어가자, 복도에는 공사를 위한 천막이 쳐져 있었다. 몇몇 임산부 커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인부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복도에 있는 교실 중 하나가 우리가 찾고 있는 교실이라고 알려줬다. 헤매던 모두가 여기서 일차적으로 당황.
공사 인부의 허락 하에 우리는 천막 너머 연기와 먼지 냄새가 섞인 복도를 지나 교실에 도착했다. 교실 안에는 우리 말고도 수업을 기다리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던 더 많은 커플들이 있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교실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수업을 진행하는 인솔 간호사도 공사 상황에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간호사도 공사 사실을 전혀 전달받지 못했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교실에 앉아서 잠시 고민을 했다. 복도에서는 공사를 계속 진행할 것이고, 이 교실로는 먼지가 들어오기는 할 텐데, 이대로 수업을 들어야 하나?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수업 장소를 바꾸지 않을까? 복도에서는 계속 드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기하던 커플들 중 몇이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한 남편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공사장에서 어떻게 수업을 합니까! 다 임산부인데, 몇 시간씩 먼지를 마시라는 건가요?”
그 컴플레인 덕분인지 인솔 간호사는 서둘러 다른 교실을 찾아 나섰고, 우리는 교실에서 빠져나와 병원 로비에서 삼삼오오 모여 대기를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이 10시를 넘었다.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인솔 간호사가 바쁘게 새로운 교실을 찾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바로 다른 장소를 섭외하지 못한 간호사는 스케줄을 재조정해서 원래는 수업 끝즈음에 진행하는 병실 투어를 당장 먼저 진행하고, 11시에 들어갈 수 있는 교실을 활용하는 것을 제시했다.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더 나은 흐름이 되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며 문득, 다른 이의 컴플레인으로 나도 덕을 보는 스케줄로 변동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의 컴플레인으로 스케줄이 조정되거나 장소가 변경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수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겠지.
나는 컴플레인을 잘하지 않는다.
그건 남을 배려해서라기보다, 불만을 표현하는 일이 유난히 피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불만을 전달한다는 건 단순히 한 문장을 내뱉는 일이 아니다. 그 이후의 모든 과정—설명, 설득, 감정의 조율, 어색함의 감수—이 한꺼번에 따라온다. 불만을 제기하는 순간, 그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내 감정의 일’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 피로감을 견디기가 싫다.
내가 생각했을 때, 컴플레인/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기술'이다. 물론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분노에 가까운 불만을 쏟아내는 경우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행위는 컴플레인보다는 그저 공격적인 분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컴플레인을 한다는 것은 상대의 잘못/책임을 짚되, 감정을 절제해야 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만큼만 단호해야 한다.
나는 그 기술이 참 어렵다고 생각된다. 나에겐 감정을 절제하는 것보다는 감정 소모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더 쉬운 것 같다. 컴플레인을 못한다고 해서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으나, 가끔은 나는 또 사이다를 모르는 호구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컴플레인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불만이 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 싫기 때문이다.
당일 출산 수업엔 26명 정도의 대기자들이 있었다. 내가 불만을 제기했다면, 그 즉시 모두의 시간이 멈췄을 것이다. 내 피해는 감수할 수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피해로 번지는 건 견디기 어렵다. 스스로 불편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타인의 불편을 유발하는 건 내 선택권 밖의 일처럼 느껴진다.
호구스럽게 생각될 수 있지만, 예로 나는 내 뒤로 줄이 길게 선 커피숍에 있는 상황이라면, 따뜻하게 주문한 커피가 아이스로 나와도 그냥 받아서 간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차이쯤은, 내가 삼킬 수 있다. 내 뒤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지연시켜 가며 컴플레인하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의 하루가 내 불만으로 더 꼬이는 건,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다.
게다가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나도 실수를 하곤 했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또 하나의 이유는, 내 감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기 때문이다. 감정은 연료와 같기 때문이다.
불만을 제기할 때는 보편적으로 짜증이나 화를 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분노나 짜증은 연비가 나쁜 감정이다. 한 번 터지면 많은 에너지를 태워버리지만, 남는 건 피로뿐이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정해져 있다면, 그 연료를 화내는 데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그냥 넘어간다. 기분 나쁜 일은 종종 있지만, 그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잊는 건 회피가 아니라 절약이다. 그건 타인을 위한 인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절약이다. 나의 에너지를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쓰기 위해.
‘그냥 넘어가면 손해가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나는 커피 한 잔의 불만을 해결하려고 에너지와 시간을 들이는 게 오히려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의 불편을 고쳐서 얻을 이익보다, 내 마음을 소비하지 않고 지나가는 편이 나에겐 훨씬 효율적이다.
게다가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타인에게 컴플레인으로 전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 감정이 아니다. 이미 나와 타인 모두의 불쾌한 공기가 되어버린다. 굳이 이 세상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늘릴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잘 절제된 컴플레인, 즉 감정의 전염이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인 결과를 내는 컴플레인은 더더욱 어렵다. 어쩌면 나는 그 복잡한 기술을 배우는 대신, 그냥 감정의 사용량을 줄이는 길을 택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는 절대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너그럽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불편과 부당함의 경계를 구분한다. 감정의 낭비를 막는 것과, 부당한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모든 불편이 같은 무게를 가진 건 아니다. 어떤 일은 그냥 넘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어떤 일은 넘기고 나면 더 큰 피해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올해 집을 새로 매매할 때, 시공사가 하자 수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명백한 하자가 맞고 해당 리스트 목록에 대해서 수리를 다 해주기 전에는 입주를 할 수 없다고 했더니 결국 계약일 전에 보수를 다해줬다. 미국 시공사의 경우 새집 워런티라는 제도가 있다면서 홍보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말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무조건 계약일 전에 보수 공사를 신청하고 마무리하는 게 좋다.
이건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나의 컴플레인 제기 기준에 관한 문제였다. 넘길 수 있는 일과 그저 넘기기만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하는 것. 모든 컴플레인은 감정의 비용을 요구한다. 나는 그 비용을 조금 더 신중하게 쓰고 싶을 뿐이다.
그날 병원 교실에서 들었던 컴플레인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불만 덕분에 모두가 편해졌지만, 나는 아마 그 상황이 다시 와도 똑같이 조용히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체념이 아니라, 선택이다. 모든 불편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 선택이 내 하루를 조금 덜 피로하게, 조금 더 평온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