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살아보기
남편이 함께였고 친구가 있었던 캐나다 생활은 미국생활 시작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외롭지 않았다.
네 식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인다는 안정감이 충만했고, 집안 어느 구석에 붙박이처럼 남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전함을 느꼈다.
네 식구 같이 마트를 가고, 장 봐온 무거운 물건들을 남편이 번쩍번쩍 옮겨 주고, 운전도 번갈아가며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학교 행사나 상담을 아빠와 함께 참여한다는 일상의 감격은 정말 누릴 가치가 있었다.
4년의 미국 생활동안 밤잠 한 번 편히 자보지 못했던 나는, 캐나다에서 남편과 함께 지내고 나서부터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집과 차를 구하고 정착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해결한 후, 학교 등록도 마친 아이들이 등교를 시작하고 나서 나는 드디어 앓아눕게 되었다.
남편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어서였는지 4년 치를 몰아서 아플 작정이라도 한 듯, 일주일을 꼬박 앓은 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픈 몸이 회복되고 캐나다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적응되어 갈 무렵, 나는 음악 관련 회사들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7-8곳 정도 지원을 했던 것 같은데, 실제로 연락이 와서 인터뷰까지 연결이 되었던 곳은 5곳이었다.
어설프고 부족한 영어로 몇 단계의 인터뷰를 거치며 결국 2곳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음악 교육 프랜차이즈 중 한 곳에서 피아노와 보컬 강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막 시작한 외노자 음악 강사에게 바로 일이 많이 주어지진 않았었다.
처음엔 대타로, 그다음엔 1회 체험 레슨으로, 다시 대타로 채워지던 나의 레슨 스케줄은 6개월 후, 주말 황금 시간대에 채워지게 되었다. 영어는 조금 부족하지만 한국과 중국,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경력 많은 선생님을 선호하는 학부모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고, 특수 교육으로서의 음악 레슨이 필요한 학생도 가르치게 되면서 더 많은 경험치를 쌓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도 직원 찬스로 이 회사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들과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레슨을 이어갈 수 있었고, 우리 아이들의 피아노 반주를 맡으며 회사에서도 콘서트 전담 반주자로 학생들의 연주를 돕게 되었다.
한인 사회에서도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레슨을 부탁해 오는 분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주 중 저녁 시간도 한두 명씩 레슨이 채워지면서 조금씩 바빠지긴 했지만, 전에 없이 한가하고 여유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의 지쳤던 몸과 마음이 쉬어가며 회복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어렸던 아이들이 이젠 제법 컸고, 남편이 함께였으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캐나다의 소도시에서의 삶은, 큰 욕심 없이 쉬엄쉬엄 살며 소소한 일상을 즐기기에 충분하디 충분했다.
그중에 큰 아이를 통해 알게 된 E의 가족과의 교제는 우리의 캐나다 생활에 단비와도 같은 인연이었다.
중국에서는 서로 존재만 알고 있었을 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던 동갑내기 아빠들은 금세 친구가 되었고, 양쪽 집을 왔다 갔다 하며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을 서로 달래주며 채워주는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