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독립

인생 독립 첫 단추?

by 은마마

중국에서는 50개 동이 모여있는 대단지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한국 교민들의 중심 거주지이다 보니 아파트 메인 게이트 앞에는 등하교 시간마다 거의 백 미터에 가까운 스쿨버스 라인이 형성되곤 했다.

유치원생과 초등 저학년이었던 우리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스쿨버스 내리는 곳으로 가면 단지 안의 모든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스쿨버스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 우르르 내리는 아이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엄마들에게 가방을 맡기고 놀이터로 뛰어갔다.

그러면 뒤에 남은 엄마들은 어깨에 하나씩, 혹은 둘셋씩 가방을 메고 놀이터로 따라가는 당연한 루틴.


미국에서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고 아이들이 등교를 시작했을 때, 둘째가 2학년이었다.

나의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은 차를 집에 두고 걸어서 아이들을 데리러 갔었는데, 아이들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가방을 받아 들곤 했다.

아이들 역시 자연스럽게 나에게 가방을 맡기고 두 팔 자유롭게 집에 걸어올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이 서너 번 계속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학교 앞에서 가방을 받아 들려고 하는데 어린 둘째가 짜증을 내면서 건네주질 않는 것이 아닌가.

왜 주질 않냐고 묻는 나에게 둘째는 대답 대신 머리로 지나가는 다른 아이들을 가리켰다.


하교하는 많은 아이들 중, 데리러 온 부모가 가방을 들어주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프리스쿨 어린아이들조차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가방을 너무 당연스럽게 직접 메고 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책가방 독립을 이루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5월 노동절 연휴에 아이들과 베이징으로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떠났었다.


이미 여러 번 갔던 베이징이었지만 이번에는 전철, 버스를 이용해서 안 가본 곳들을 도전해 보기로 했다.

당시 만 5세, 7세였던 아이들에게 2박 3일 동안 필요한 옷과 속옷의 개수만 알려주고 자신들의 백팩에 스스로 챙겨 들고 다니게 했다.

아이들에게는 무거운 물건들만 엄마 아빠가 들어주겠노라 얘기하고 옷가지들은 거의 우리 부부의 가방에 몰래 옮겨 담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가방에는 속옷과 칫솔, 손선풍기 정도만 넣어져 있긴 했다.


힘들어서 찡찡댈 때쯤에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입에 넣어주며, 각자의 가방을 메고 대중교통으로 넓고 넓은 베이징을 누볐던 2박 3일은 정말 재미있었고 아이들이 참 대견했던 시간이었다.


이후로 아이들은 크고 작은 모든 여행의 가방을 직접 싸고 있다.


KakaoTalk_Photo_2026-04-09-23-23-39.jpeg 같은 해 여름휴가 때 아이들이 스스로 싸 놓은 각자의 캐리어




미국과 캐나다, 두 나라 모두 한인이 거의 없는 동네에서 살고 학교를 다녔더랬다.

그 5년 반 동안 아무리 큰 가방이라도 스스로 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익숙해진 나의 눈에 하노이에서 마주친 다 큰 중학생들 가방을 들어주는 엄마들의 모습은 참으로 생소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가.. 불과 5년 반 만에 중국의 생활을 잊은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영하 30도의 눈 덮인 날씨에도 아이들은 스키복을 입고 스노우부츠를 신고 걸어서 학교에 갔던 터라, 이 따뜻하고 편리한 환경에서도 그리 보호를 받는 큰 아이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내 어깨에서 자신들의 어깨로 스스로 책가방을 옮겨간 일은, 나중에 모든 책임과 의무를 부모의 어깨에서 스스로의 어깨로 옮겨 갈 인생 독립 연습의 첫 단추라 여겨졌었다.

결국에는 이 소중한 아이들을 우리 부부의 그늘에서 완전히 독립을 시키는 것이 부모로서의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작년 11월, 2박 3일의 수학여행을 다녀온 아이들의 가방 역시 싸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보내온 패킹 리스트만 보여주고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챙기라고 했고, 없는 물품들만 미리 체크해서 구입해 주었었다.

아직은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기에 출발 전 날 밤에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고 보냈었다.


어릴 때부터 여행을 자주 다닌 아이들은 짐을 참 잘 싼다.

귀차니즘 큰 아이는 딱 필요한 물건들만 최소한으로 챙기고 뭐든 열심히 하는 둘째는 일주일 전부터 쌌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열과 성을 다한다.


지난 월요일, 늦은 출근을 하던 남편이 현관 앞에서 나를 부른다.


"문에 붙은 이거 뭐야?"


- Don't forget PE kit!


일주일의 부활절 방학을 끝내고 등교를 한 둘째가 체육복과 운동화를 두고 갈까 봐 대문짝 만하게 써서 붙여놓은 모양이다.

귀엽기도, 대견하기도 해서 현관 앞에서 남편이랑 한참을 웃었더랬다.


커가면서 스스로 독립을 준비해 가고 있는 아이들.

이렇게 커가는 모습을 지금은 열심히 응원하며 지지해 주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정말로 우리 곁을 떠날 때엔 짐을 함께 싸 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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