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학생, 전업 엄마
처음부터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우연한 기회로 작은 미국계 국제학교에서 초등학교 음악을 가르치던 내가 영어의 한계를 자주 느끼자, 남편이 2년 정도의 유학을 제안했다.
또한 십년 째 미국에서 살고 계신 이모가 고용을 약속해 주셨기에 일자리와 신분 해결의 열쇠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떠나오게 된 미국이었는데, 코로나를 만나버렸다.
1~2년을 예상했던 어학코스가 반년만에 끝나버렸고, 함께 계획을 세웠던 미국의 가족에게 버림받은 상황, 코로나로 한국도 중국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 부부는 일단 본과 공부를 시작하고 여기서 자리 잡아보자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선택당한(?) 2년 반의 full-time student의 삶은, 힘듦이 턱까지 올라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 끝나면서 아이들도 나도 각자 캠퍼스로 돌아갔고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이들과 나의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다준 후, 나도 바로 등교를 했다.
아이들의 방과 후 일정이 없는 날에는 수업이 마치면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이고 공부를 봐준 후, 나의 공부를 하곤 했다.
아이들의 방과 후 일정이 있는 날이면 아침에 나설 때 차에서 먹일 저녁 도시락과 각자의 스케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일들까지 챙겨서 나갔어야 했기에, 아이들 한 명 당 두 개의 일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큰 아이는 바이올린, 둘째는 축구를 했는데, 각자 주 2회의 스케줄이 있다 보니 주 7일에 4일 저녁시간을 운전으로 길에서 보냈어야 했다.
특히 큰 아이의 오케스트라 연습과 둘째의 축구 경기가 있는 토요일엔 축구 경기의 장소에 따라 운전만 서너 시간씩 하는 날들도 많았다.
이 모든 일정을 셋이 한 몸이 되어 움직여야 했고, 매 번 외식을 할 수도, 그렇다고 매 번 맥도널드로 끼니를 때울 수도 없어서 아이들 먹을 것을 늘 챙겨 다니느라 영어 실력보다는 후딱 요리 실력과 운전 실력이 더 빨리 늘어갔다.
그나마도 아이들이 아프지 않은 때엔 정신없이 바쁘긴 했어도 평온한 일상이었지만 운동을 좋아했던 둘째 덕분에 수업 중에 전화를 받고 아이들의 학교로 뛰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한 5년 치는 늙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미식축구(여자아이인데!)를 하다가 상대편 친구가 실수로 아이의 머리를 발로 차서 뇌진탕으로 기절을 했다는 연락을 받고 미친 듯이 학교로 뛰어가 응급실로 데리고 갔던 일(이 사건으로 아이의 학교에서 미식축구가 금지되었다), 역시 쉬는 시간에 운동을 하다가 다리를 접질려서 걷질 못한다고 연락이 외서 또 데리고 병원으로 가 깁스를 했던 일, 어릴 때부터 천식기가 약간 있었던 아이의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며 데리고 가라고 연락을 받아 수업 도중에 나와야 했던 일 등.
멀쩡히 공부 잘하고 있는 큰 아이까지 데리고 나와서 병원에 가거나 두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던 날이 얼마였는지..
공연 실습이 있어 밤에 학교를 가야 하는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 공연장이나 대기실 구석에서 숙제를 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공부를 하며 아이들을 챙기는 일은 중국에서 가사 도우미를 쓰며 음악 선생으로, 합창 지휘자로 편히 살던 나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있으면서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되었던 나는 코로나를 두 번이나 겪으면서도 한 번도 앓아누운 적 없이 정신력으로 버텨 나갔다.
그럼에도 한국서 음악을 전공했다는 자존심과 어학코스 장학생이라는 자긍심으로, 공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역만리 중국에서 코로나로 발이 묶여 만날 수도 없이 기러기로 지내고 있는 남편의 지원을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게 2년을 지내며 어학원 장학금 외에 음악학부 장학금도 두 번을 타며 성적 우수자로 과정을 마쳤고, 과정 수료 후에는 OPT(대학 혹은 대학원 졸업생들에게 주는 1년-3년 기간의 인턴십 허가서)로 시애틀의 한 한인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단한 공부도 아니었고 석박사도 아니었지만, 2년의 유학생활 끝에 얻은 수료증과 일자리는 그동안의 모든 수고를 덜고도 남을 만큼 감사한 일이었다.
더욱 큰 감사는 고용된 한인 교회의 지원으로 전문직 영주권 절차를 밟게 된 것이었는데, 이렇게 우리 가족의 미국 이민계획은 유학 3년 만에 순조롭게 시작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