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두려움 없이 삽니다
인생의 첫 번째 책을 꼽으라면 중학생 때 읽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뽑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러 이유로 이 책을 좋아하겠지만 제게는 하나의 장면이 마치 영상처럼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니나는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재능 있고 영민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학업을 이어가기 힘들게 되고 그녀를 연모하던 쉬타인 박사는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러나 니나는 먼 친척뻘 되는 죽어가는 할머니의 병시중을 들러 떠납니다. 할머니가 죽으면 가게를 물려받는다는 조건입니다. 니나는 인적 없이 퇴락한 마을의 낡아빠진 가게에서 먼지 앉은 진열장에 놓인 오래된 술과 담배를 팝니다. 가게 뒤쪽에는 의자에 앉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니나는 할머니의 눈에 붙은 파리를 쫓고 입을 벌려 죽을 먹이고 입가에 흘러내린 죽을 더러운 수건으로 닦아냅니다. 무거운 할머니를 들어 기저귀를 갈고 용변을 처리합니다. 니나를 찾아와 자신과 함께 대학으로 돌아가자고 간청하는 쉬타인 박사에게 니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에요."
니나는 자기 앞에 닥친 생에 놀라 울부짖거나 달아나지 않습니다. 타인의 호의 뒤에 숨지도 않습니다. 담담히 마주하고 살아냅니다. 그 모습이 좋았습니다.
오랫동안 니나를 잊고 살았습니다. 젊은 날 저는 애쓰고 살았습니다. 남편과 싸우기라도 하면 얼른 화해해서 원래의 평화로운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니 화해를 청하는 쪽은 언제나 저였지요. 빨리 행복해지려고 했거든요. 조금이라도 불행한 시간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어디 남편 하고만 그랬을까요? 불편하고 힘든 일은 얼른 해결하고 벗어나고자 애쓰고 매달렸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앞에서도 조바심을 치며 안달했습니다. 그러니 인생이 조금만 고약하게 굴어도 얼마나 놀라고 흔들렸던지요.
여전히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은 멀리 있지만 이제 젊은 날처럼 애쓰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싶으면 그다음은 마음 쓰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삶이 주어졌다 해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 역시 자기 인생을 품위 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두려움이 없이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