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자신의 바다를 항해할 뿐입니다.
대학시절, 안동 가는 버스 안에서 시골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르마 같이 곧은 논길 사이로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 한 명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앞뒤를 둘러봐도 막막하게 펼쳐진 논뿐, 어디에도 동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8월의 한 낮,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햇빛 쏟아지는 논두렁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어깨가 지쳐 보였습니다. 지평선이 닿는 곳까지 팽창한 초록을 보며 마치 내가 뙤약볕에 아래 걷는 듯 숨이 막혀왔습니다.
도시의 편의에 길들여진 청춘의 눈에는 소년의 시골 생활이 퍽 안타깝게 상상되었습니다. '매일 차도 다니지 않는 이 길고 먼 길을 걸어 학교에 가겠구나. 밤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도 사러 갈 슈퍼도 없겠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작고 하찮은 것을 불편의 기준으로 삼았다 싶지만 그 당시에는 중요해 보였습니다.
'세상에 재화는 한정되어 있는데 누군가 많이 가져가서 누군가 적게 가지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많이 가져서 저 아이가 적게 가진 것은 아닐까? 왜 누군가는 처음부터 불편한 삶을 시작해야 할까' 저는 그때 꿈을 포기한 가난한 대학생이었을 뿐인데도 도시의 대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제가 많이 가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사회학적인 시선이나 철학적인 사유로 발전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도는 생각이었지만 꽤 오랫동안 저를 지배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좋은 환경과 척박한 환경을 비교해 보면 세상은 거대한 부조리 덩어리로 보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회인이 된 어느 여름날, 어릴 때부터 각별한 막내 고모가 살고 있는 서울 구로동에 가게 되었습니다. 고모집 근처에는 구로시장이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고모와 시장으로 찬거리를 사러 나섰습니다. 시장은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가뜩이나 좁은 시장길 양면에는 상인들이 가게 앞에 물건들을 내어놓아서 마주 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쳐야 겨우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과일 가게에는 까만 파리가 붙은 끈끈이가 춤을 추었고, 흰색 러닝셔츠 아래 드러난 상인의 어깨는 땀으로 번들거렸습니다.
저는 가게 입구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돼지 족발에 머리를 박지 않으려고 목을 움츠리고, 시장 바닥에 고인 물을 밟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조심히 내디뎠습니다. 냉난방이 쾌적한 마트에서 장을 보는 제 일상을 떠올리며 오래전 안동 중학생에게 품었던 마음이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희미해지긴 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생에 대한 비교가 말이지요.
그러다 서울 삼성병원에서 암수술을 받고 퇴원 후 막내 고모집에 몸조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모는 저의 수술 후 회복을 돕기 위해 매일 시장을 다녀왔는데 그날은 함께 구로 시장에 갔습니다. 저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겨우 몇 걸음 걷는 몸이었지만 바깥바람도 쐬고 입맛 당기는 음식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횡단보도 너머 시장입구에서부터 활기가 느껴졌습니다. 둥그런 배에 검정 비닐앞치마를 입은 아주머니는 자기 키만큼 기다란 은빛 갈치의 꼬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벌건 턱살이 목을 덮은 얼굴로 갈치를 들고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생의 에너지가 은빛 갈치처럼 파닥파닥 반짝였습니다. 곧,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여 생의 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삶이 싱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반짝이는 생의 활기에 압도되었습니다.
남의 인생을 두고 어설픈 동정을 했던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 더 편리한 것이, 더 쾌적한 것이' 우월하다는 착각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생은 저마다의 생기로 반짝입니다. 특출 나지 않아도 저마다 특별합니다. 최고급 요양병원에 우아하게 누워있는 노부인에게도 비린내 나는 생선장수에게도 생은 각자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제 감히 소중한 생을 두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 기쁨과 슬픔을 내 잣대로 재지 않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자신의 바다를 항해할 뿐입니다.